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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Feb 03.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우리의 삶에 건네는 잔잔한 위로

우리는 분명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 스포주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세 시간짜리 영화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는데 영화를 보자마자 역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다 싶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나도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중간중간에 여러 상징들을 고민하고, 대사들 속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하느라 메모장을 따로 꺼내 들었을 정도이다. 마치 탐정이 되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떡밥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에 따라 개인마다 느껴지는 이야기의 온도가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일본 사회를 사람들 간의 관계, 로맨스에 빗대서 설명하는 감독의 특성상 일본의 역사와 사회를 안다면 더 생각할 부분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을 엮어 시나리오를 작성하였다.


이 영화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고 아내의 '진심'을 의심하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그 진심이 무엇인지 묻지 못하고 고통받는 가후쿠라는 남자에 관해 그리고 있다. 가후쿠는 이 상처를 안고 바냐 아저씨라는 안톤 체호프 연극을 연출하기 위해 히로시마로 떠나는데, 히로시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상처를 치료해 간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지만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는 액자 속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대사량이 상당히 많아서 말속에 담긴 은유들을 음미하기 좋았다. 마치 책을 읽는 기분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일본 영화가 가진 느리 호흡 때문에 다소 사건의 전개 속도가 느리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특유의 잔잔한 감성, 은유적 표현, 상징 등을 통해 예술 그 자체를 느껴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1. 불편함을 표면으로 꺼내는 용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아마도 ‘불편함을 표면에 꺼내는 용기’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주인공인 가후쿠는 딸을 잃은 슬픔, 아내 오토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였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절대 그 불편함을 꺼내지 않는다. 가후쿠는 끊임없이 차를 운전하면서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읊는데, 이 희곡은 절망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에 자신을 이입하여 이 절망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 것을 다짐한 듯하다. 아내에게도 슬픔과 절망을 드러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오히려 아내와의 사이를 악화시킨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본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 키리시마 레이카가 매력적으로 연기하였다.


가후쿠와 달리 오토는 삶의 변화를 주면서 끊임없이 이 불편함을 표면화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녀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만다. 가후쿠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저녁때 이야기하자던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던 가후쿠에게 어떤 무정함을 느낀 게 아닐까? 고백하고 응답하지 않은 상대방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일상의 균열에 대해 응답하지 않은 가후쿠에게 그녀는 어떤 절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가후쿠가 연극제를 하러 ‘히로시마’라는 도시에 간 것도 불편함을 영화 주제로 생각한다면 의미심장한 장소라 생각한다. 히로시마는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 근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하지만 동시에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표면으로 끌어올려지지 않고 계속해서 안에 고여있다면 고통이 된다. 가후쿠가 아내의 마음을 의심했지만 끝끝내 그것을 수면 위에 올리지 못하고 끙끙 앓을 때 괴로움은 더 커졌다. 하지만 운전수 미사키의 말처럼 오토가 가후쿠를 사랑하면서도 다카츠키와 잠자리를 한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다카츠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토가 가후쿠와 다카츠키에게 해준 칠성장어 이야기도 결국 돌아갈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자신이 준 변화에 어떠한 응답도 없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후쿠가 이것을 차라리 표면에 끌어와서 미사키와 이야기했더라면 어떨까. 불편하다는 이유로 끌어올리기를 외면할 때 심중의 고민은 더 깊어지고, 별것 아닌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여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막상 남에게 털어놓으면 고민이 별것 아닌 게 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미사키는 홋카이도에서 자신의 과거, 엄마와의 관계를 가후쿠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심중의 병을 털었고, 다카츠키 역시 속에 담아두는 법 없이 모든 걸 드러냄으로써 가벼워지기를 택하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경찰이 찾아왔을 때도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잡혀가지 않는가. 이 인물둘의 행동에 감독의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다카츠키와 가후쿠, 서로가 불편한 관계이지만 오토를 그리워하는 둘은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다카츠키는 차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 불편한지 알고 그것을 직시하는 용기가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실마리라는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다카츠키는 내면의 공허함이 많고 이것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인물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가후쿠는 다카츠기보다 성숙하고 사회적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내면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불편함을 직시하기보다 외면하고, 덮어두려 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다카츠키는 이 불편함을 가장 표면으로 잘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불편한 이야기도 먼저 나서서 말하고, 가후쿠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술을 먹자고 제안하는 쪽도 늘 다카츠키이다. 자신을 먼저 직시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적극적이 자세로 먼저 다가가는 것,  이 용기에 대해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대비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렇다면 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토는 어떤 마음으로 다카츠키와 관계를 맺은 것일까?


#2. 사랑은 온도를 맞추는 일.

 

사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영화는  진실이 얼마나 부질없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질문 자체가 너무 가후쿠스럽고, 자기 자신의 관점에만 갇혀 있을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러므로미사키도 소냐도 그냥 살기 위해  것일  크게 의미를 두지 말라고 가후쿠에게 말해준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사고하지 않는 게 사랑의 핵심이다. 그런데 가후쿠는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연극을 기획하는 건 흥미롭다. 연극에서 유나와 다른 배우들은 다른 언어로 소통하지만 무언가 통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상 표면에 있는 말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하고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의 기본이기도 하다. 좋은 연기자는 상대방에게 맞출 줄 아는 배우이고,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할 줄 아는 배우이다. 이 반응은 말 자체를 열심히 듣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보다 상대방의 정서에 반응하는 것이 교감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결국 어떤 언어로 소통하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가후쿠는 말 자체를 듣는 사람이지, 정서에 교감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가 오토의 정서에 반응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녀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일상에 준 변화에 그는 어떤 반응을 하였는가? 사실 그는 반응하지 않았고 교감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가후쿠의 고집은 그의 자동차에서도 잘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운전을 맡기길 극도로 싫어했으며, 차 운전대 방향은 통상적인 일본차와 반대방향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 차를 몇십 년간 몰고 있다.



가후쿠가 이 차를 미사키에게 맡기고 그녀의 이야기에 궁금해할 때부터 진정한 교감이 일어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의 관심은 타인에게 향해지고 마침내 자기의 삶의 방식만 고수하지 않고 남의 삶의 방식, 운전방식에 자기를 내 맡길 줄 알게 될 때 미사키와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3. 관성의 법칙 VS 틀을 깨는 변주


다시 돌아가고 회귀하는 것, 돌아갈 자리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회귀성 어종인 칠성장어를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도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오토가 아무리 다른 남자를 만나고 변화를 주어도 결국에는 가후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일본의 일반적인 차들과 핸들 방향이 반대이다.


일본의 차와 반대방향으로 운전대가 있던 가후쿠의 차가 마침내 정방향인 한국에 와 있다는 것도 결국 돌아올 곳에 돌아오고 만다는, 어떤 회귀의 법칙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기존에 하던 관성을 깨버리는 색다른 행동, 변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변주는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장치가 되기도 하며, 사건의 변화를 주는 중요한 트리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처음의 변주는 오토에 의해 일어난다. 오토는 다카츠키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원래 가후쿠와 관계를 하며 만들어온 이야기를 그와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카츠키를 만나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법칙이 생겨버린 와중에 다시 한번 변주를 주는데 그것은 가후쿠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저녁에 보자고 한 것이다. 그녀가 곧 다카츠키와의 관계를 가후쿠에게 털어놓겠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물론 그녀의 죽음으로 이 변주들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러한 변주들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두 번째 변주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가후쿠와 미사키의 손을 클로즈업 한 장면을 통해 보인다. 가후쿠는 원래 차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미사키에게 지시하는데, 이 법칙을 깨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바냐 아저씨 연극을 앞두고 미사키의 고향인 홋카이도에 충동적으로 간 것, 그리고 그녀의 정서에 반응한 것 이 모든 변화가 담배를 통해 집약해서 드러난다. 가후쿠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결단한 변주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한 채로 다시 원래의 공간, 연극을 하는 히로시마로 돌아와 바냐 아저씨를 하는 것은 그가 다시 원래 돌아올 곳으로 회귀하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변주를 통해 성장했고 다시 돌아왔지만 달라졌다. 바냐 아저씨 역할을 예전과 같이 수행하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관성과 변주, 관성과 변주 끊임없는 이 반복 역시 거시적으로 보면 관성이겠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대단한 변화이며 이 변화가 삶을 결정한다.



#4. 바냐 아저씨 그리고 위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유나가 수화로 연극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사를 가후쿠에게 하는 장면 말이다. 어떠한 소리도 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유나의 수화만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독특하지만 몰입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유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매력적인 배우 박유림


이 대사의 핵심 주제는 어떠한 고통이 있더라도, 이 고통이 이 생에서 해결되지 않더라고 결국 우리는 그냥 살아갈 것이고, 이 살아감이 구원 그 자체라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도, 이별해도, 사랑이 무너져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그냥 살아간다. 세상에 다시없을 슬픔을 겪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것. 그것은 저주이자 구원이기도 하다.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선 히로시마라는 도시,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벗어난 남자 가후쿠, 유년의 상처를 딛고 꿋꿋이 새로운 도시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미사키. 이 모든 게 그냥 살아가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생각된다. 감독은 유나의 수화를 통해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가후쿠 그리고 관객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눈에 밟힌다.


"우리는 분명 조용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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