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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Jan 24. 2022

사랑에 대한 열망, 그 순수함이 주는 치열함에 대하여

마틴 스코세이지의 '순수의 시대'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소재에는 한계가 없지만 이런 시대극 로맨스물까지 섭렵하였는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그저 시대극, 로맨스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 장르만 그럴 뿐 여전히 마틴 스코세이지가 영화에 담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순수의 시대 포스터


영화를 탐구하기에 앞서 본 영화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자면  ‘순수의 시대’는 이디스 워튼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녀가 쓴 소설은 대부분 시대적 상황이 준 불합리한 억압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욕망, 그것을 대처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그녀가 왜 여성의 삶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디스 워튼이 살았던 시대에 여성이야 말로 불합리한 억압을 받는 주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선 프롬, 여름 등이 이디스 워튼의 대표 소설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억압과 인간에 내재된 욕망의 충돌이야말로 마틴 스코세이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인 주제의식이다. 그는 실제로 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이전의 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띈 배우는 미셀 파이퍼이다. 미인대회 우승자답게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지만 연기도 섬세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각 씬마다 목표가 분명했다고 생각하고 덕분에 그녀의 마음의 변화, 행동의 뚜렷함도 분명했다고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목표, 그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 그를 내치려는 의도 모든 게 분명하게 보였다고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인 다니엘 루이스는 마음속에 열정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차마 표출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과 침착함을 지닌 뉴랜드라는 인물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역시 이미지 캐스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그의 눈빛에 이러한 인물적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 발음이 미국 발음도, 영국 발음도 아니어서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이러한 연기에도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깊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안타깝다.



나는 이 영화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아주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러 상징을 통해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고(특히 꽃에 대한 부분, 색깔의 대비를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낸 연출), 각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나를 반추하게 한다. 나라면 뉴랜드의 입장에서 어떻게 행동하였을 것인가. 마지막에 끝내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고 엘렌과 같이 기꺼이 그를 놓아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게 만든다. 훌륭한 영화는 관객이 영화관을 나오고 나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영화가 꼭 그렇다.


아무래도 남의 시선에 자유롭지 않은 시대고 욕망을 발현하기 쉽지 않은 시대다 보니 주인공들의 행동이 제약되어 있고 이 장애는 역설적이지만 스토리에 몰입감을 더한다. 시대극이 가진 일종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쉽지 않은 시대인만큼 사랑에 대해 더욱더 욕망하고 절실한 시대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결국 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 특히 뉴랜드가 그렇다. 생각해보면 뉴랜드는 결혼, 출산 등을 엘렌에 대한 마음과 상관없이 진행한다. 뉴랜드는 충실히 남편, 가장이라는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해 아쉬워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순수하지 못하며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이 애초에 순수하기만 했더라면 그 모든 걸 내던지고 사랑에 자신을 내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사랑했던 엘렌을 잊지 못하며 여생을 보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그리워하지만 차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며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점에서 그를 순수하다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충성심, 첫사랑에 대한 지고지순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걸지 못했고, 아내가 있으면서도  첫사랑을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순수하지 못하다.  역설은 굉장히 흥미롭다.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변명하게 만드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제목을 통해 뉴랜드가 순수하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혹은  역설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여러 의미로 생각해도 정말인지 탁월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엘렌은 어떤가? 그 시대의 이혼을 선택한 인물답게 매사에 과감하다. 그녀는 뉴랜드를 오랜만에 만나서도 예전 기억을 환기시키며 그를 유혹하고, 전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는 선택을 고려하기도 한다. 또한 꽃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뉴랜드에게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뉴랜드는 그녀의 노력에 부응하기보다 계속 머뭇거린다. 결정적인 순간엔 그녀를 놓는 선택을 한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기회를 주었지만 끝끝내 부응하지 않은 뉴랜드에게 닫힌 문으로 그녀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녀는 확실히 순수하다. 주변의 시선에 상관없이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는 뉴랜드의 아내인 메이와 대비된다. 주변을 의식하면서 그와의 결혼을 적절한 시기에 하기 위해 조율하고 탁월하게 감정을 숨기면서 뉴랜드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녀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목표했던 바를 이루는 치밀한 인물이다.


오랜만에  엘렌을 재회하였음에도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뉴랜드


하지만 이상하게도  메이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마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엘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그 용기, 쉽지 않은 그 용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엘렌을 꿈꾸는 뉴랜드가 되어 노을을 바라보는 엘렌을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순수한 용기 그것에 대한 지독한 추구 하지만 그것이 지닌 엄청난 책임감. 영원히 붙잡히지 않는 로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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