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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Feb 13. 2022

영화가 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덩케르크, 아이맥스 재개봉 관람 후기 *스포주의

미군 주둔 기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벽화에는 ' Far away from home'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고향을 떠나 산다는 것, 그건 상상 이상으로 힘겨운 일이다. 잠깐의 유학생활 동안 나는 삶의 의지가 활활 탓었는데 그 이유는 집에 건강히 돌아가서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 때문이었다. 참 이상한 마음이다. 아무리 좋은 경치를 봐도, 맛있는 걸 먹어도 고향이 생각난다.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고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는 병적으로 한식을 찾아다녔다. 평소에 요리 한번 하지 않던 내가 영하 30도의 추위를 뚫고 한인마트에 가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집에 돌아갈 날을 그렇게 기다렸다. 유학도 이런데 실향민이나 전쟁 때문에 갇힌 군인들에게 고향이  얼마나 절절한 의미일지는 상상도 안 간다.




덩케르크에 나오는 무수한 군인들도 'Home'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프랑스 군인도 집에 가고 싶다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많은 영국 시민들이 그들에게 Home을 가져다주기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배를 몰고 달려간다. 그런 그들을 보며 해군 장교는 '조국(Home)'이 오고 있다며 감동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지척 앞이 고향 땅이지만 봉쇄당한 상황에서, 배가 뜰 때마다 격추당하는 상황에서 그 고향은 너무나도 먼 땅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영화는 이러한 절망을 앞뒤 맥락 없이 바로 관객에게 들이민다. 아이맥스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화면에 거대한 절망이 그대로 느껴진다. 총소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서 울리고, 순간적인 판단일 뿐인데 생과 사를 급박하게 오간다. 



왼쪽부터 알렉스(해리 스타일즈), 깁슨(어나이린 바너드), 토미(핀 화이트헤드). 해리 스타일즈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연기에 도전하였다.



전쟁 영화의 공포는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공격 때문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인간의 도의와 신의, 윤리를 저버리는 순간, 인간이 문명의 탈을 쓴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군을 외면하고 철수 작전을 수행하는 영국군, 생존을 함께한 동료였지만 배가 침몰하는 위기의 순간 토미와 깁슨을 사지로 내몰아버리는 알렉스, 침몰한 배에서 겨우 탈출했지만 배가 뒤집어진다면서 구호선에 내민 손을 저버리는 사람들. 생과 사가 오가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면서 죽어갔을까. 구호선을 탔을 땐 곧 침몰할 사실을 모르고 구명정에 탄 사람들을 외면하는데, 침몰해버리자 구호선 군인들은 구명정 군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죽음은 예측할 수도 없고 그 앞에서는 체면도 자존심도 없다. 이 장면이 잔인한 생존의 아이러니를 나타낸다.




구축함을 기다리는 토미, 지척이 영국이지만 기다리는 배는 쉽사리 오지 않으며 적군의 공세는 쉬지 않고 몰아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고결한 희생'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연료가 떨어져 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 페리어, 민간선에 불과하지만 총하나 없이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도슨, 피터. 깁슨이 위기에 빠진 순간 기꺼이 그를 변호하며 자신도 위험에 처할 뻔한 토미. 그리고 토미를 구해주었던 깁슨. 알렉스를 구해주었던 토미의 손. 그들의 작은 협력들 모여 많은 사람들이 구사일생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베푼 작은 호의가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생명도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극적 클라이맥스는 더 올라가고, 그 호의의 값도 더욱 숭고해진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손길들이 모여 결국 30만 명의 군인들이 'Home'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적을 만든 것이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각박해졌다. 이방인들을 배척하기 위해서 거대한 장벽을 만들고, 혐오하고 혹여나 내가 베푼 호의가 구설로 돌아올까 봐 몸을 사린다. 이젠 누군가 길에 쓰려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길을 걷는 사회가 될까 봐 무섭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없어지고 가족은 와해되는 와중에 옆집 사람이 홀로 죽어도 몇 달간 모르는 세상이다. 코로나가 퍼지면서 생존을 위한 배척은 더 심해졌다. 호의, 친절, 포용보다는 외면이 더 익숙해진 현재, 우리는 다시 한번 큰 기적이 필요한 순간에 이를 만들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하게 된다.


이 영화는 사실상 모든 걸 담고 있다. 영화가 가져야 할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돌아가 보게 하는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흥미, 재미, 신파, 감동, 애국, 전우애,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처 등. 담지 않은 것이 없다.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미친 연출은 할 말이 없다. 도전적인 카메라 샷이 많다.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 전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려고 많은 공을 들였다. 도대체 이 영화가 놓치게 뭐지 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보는 내내 그냥 한숨이 나왔다. 이런 연출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은 매 순간 레전드를 찍고 있다. 그는 언급된 영화들의 각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매 순간 전설을 쓰고 있다. 덩케르크의 플롯은 적진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단순한 주제와 탈출하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이지만 하나로 연결하는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야기에 매료되게 만든다. 그가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은  이 단순한 이야기, 플롯 안에 담지 않은 교훈이 없고 재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친 연출력은 '이게 영화구나'하는 생각을 절로 느끼게 만든다.


그를 드니 빌뇌브와 비교하게 된다(그의 최신작 '듄'도 같은 시기에 아이맥스 재개봉하였다). 동년배이면서 할리웃에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두 감독. 둘 다 관객의 심장을 가지고 놀지만 스타일이 정말 다르다. 드니 빌뇌브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특유의 느린 전개로 인물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한 인물이 가진 그림자를 집중 조명한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일수록 처음 가졌던 생각들, 가치관들을 전복시키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변모하는 성격, 가치관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액션이나 전투신이 나오면 예상치 못한 박자감에 적의 한방이 날아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갑자기 놀라게 된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액션은 방심한 순간에 훅을 꽂는다기 보다 예상 가능한 타이밍에 공격이 온다. 다만, 그 공격 시점까지 치밀한 빌드업이 있어서 롤러코스터 맨 꼭대기에 올라간 심정처럼 추락을 기다리는 느낌으로 마음 졸이면서 영화를 보게 만든다. 또한 드니 빌뇌브에 비해 인물이 단편적이다. 인물의 성향, 성격은 매우 뚜렷하다. 처음의 생각, 가치관을 좀처럼 바꾸는 법이 없고 이 일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해내고 마는 결론으로 우리에게 카타르시즘을 준다.


나는 둘의 스타일을 모두 좋아한다. 누구 하나 꼽을 수 없이 그들이 만든 영화를 하나하나 다 애정 한다.  그런데 덩케르크를 이제야 아이맥스로 보게 되다니 억울한 느낌이 든다. 진작 보았어야 할 영화이다. 그것도 그냥 넷플릭스가 아니라 아이맥스로... 


덩케르크는 정말 미친 영화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관객을 두 시간 동안 잡아두면서 쉴틈을 주지 않고 압도한다면, 그건 정말 훌륭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몰입이 어려운 세상에서 몰입을 두 시간이나 하게 하다니..! 



군인도 아니지만 전장으로 기꺼이 달려간 도슨, 죽은 공군 아들을 생각하며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부성애, 애국심 등을 보여주는 캐릭터.



영화를 통해 실제 덩케르크 전투를 찾아보고 있다. 정말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잊힌 역사와 사람들에 대해 발굴까지 시키는 영화라니.. 이러한 이야기를 찾아내서 최고의 영화로 만들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에 존경을 표한다. 그를 통해 잊힌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감 속에서 찾아낸 희망, 의지, 기적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재조명하게 된다. 영화, 문학, 예술이 해야 할 일이 이런 것 아닐까. 다시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것 말이다.


패잔병으로서 지위를 고민하던 알렉스에게 생존도 고귀한 승리이며 가장 잘한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해준 한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무수한 많은 과거들의 위기를 겪고 여전히 인간이,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고 지탄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 생존을 통해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무나도 좋은 영화. 십 점 만점에 십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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