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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4. 2022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남은 건 볼 품 없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그의 첫 시작,  영화 '열정'

  지난해 '드라이브 마이카'로 돌풍을 일으켰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특히 한국에서 그의 인기가 심상치 않았다. 상영시간이 무려 6시간에 달하는 영화 '해피아워'도 재개봉 열풍이 불었을 뿐만 아니라 류스케 월드의 시작을 알린 '아사코' 역시 재조명받았다. 이제는 명실상부 아카데미 수상 감독의 반열에 올라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열정'은 도쿄 예술대학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사실상 그의 첫 데뷔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매력적인 두 배우 카와이 아오바 그리고 오카모토 류타.


  독립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묘한 질투마저 느꼈다. 대학원 졸업 작품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놀랐다. 그가 요즘 만드는 영화와 비교할 때 연출적으로 성숙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힘이 엄청났고, 사이사이 긴장을 주는 요소들도 적절히 배치되었으며 그만이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은유가 곳곳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사코, 해피아워, 드라이브 마이 카를 거쳐 하마구치 류스케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이 영화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는 주인공 카호의 생일 파티로부터 시작된다. 카호는 10년이나 만난 토모야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친구들에게 이를 발표하려고 한다. 하지만 왠지 이 식사자리는 불편하다. 앵글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울 만큼 각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결혼을 발표하면서도 싸한 분위기, 울면서 세수하겠다고 나가는 친구, 카호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하고 말해버리고 마는 친구 등.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묘한 긴장감만이  식사자리를 맴돌고 있다. 가장 정석적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시작했다고 본다. 인물들과 그들이 가진 일상적 결핍을 소개하면서 그들 간의 갈등을 대사로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연출적으로 보여준다. 함축적이고 간결하면서도 한 컷 한 컷 의도한 힘이 많이 들어간(?) 도입부. 이는 후반에 갈수록 느슨해진다.


  재밌는 지점은 이때부터 하마구치 류스케만의 특색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진가는 끝으로 갈수록 분명해진다. 마지막 두 씬은 스토리 상 중요할 뿐 아니라 류스케만의 연출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지점에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중해야만 하는 장면이다.


  카호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절절한 고백을 하는 오카베 나오(갑자기 극 중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씬은  공장 굴에서 연기가 나오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한참 동안이나 그 둘의 목소리만 나오고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카호와 나오가 앵글 안으로 가까이 들어온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익숙하거나 편안한 구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앵글을 통해 감독은 이 둘의 이루어질 수 없는 불안한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이 씬에서 대사도 매우 흥미롭다. 카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관에서 되살아난 이야기를 하며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하자 나오는 모든 것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지적하다. 나오는 카호의 말을 꽤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녀에게 조언하는 것이다. 카호는 나오의 말처럼 토모야가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가리고, 진실을 회피한 채 결혼하려 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트럭이 갑자기 끼어드는데 의도한 연출이 아니라고 한다. 우연이지만 작품의 주제와 맞아떨어져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이 씬은 바로 마지막 씬으로 이어진다. 끝끝내 나오의 고백을 거절한 카호,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 이 사실을 토모야에게 고백한다. 토모야는 덤덤하게 듣더니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며 카호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한다. 카호는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토모야의 감정적 공격에 그 어떤 방어나 공격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사랑을 찾았다는 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기까지 한다. 그녀는 공격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 그것을 되받아치지 않음으로써 폭력의 절댓값을 줄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런 그녀의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태도가 이 마지막 씬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카호와 토모야


  신기한 지점은 카호의 무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토모야가 자발적으로 카호에게 다시 돌아왔다는 점이다. 토모야가 가망 없는 짝사랑을 빨리 접고 카호라도 붙잡기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도 맞지만, 카호의 이 무력한 대응 아닌 대응도 토모야의 어떤 지점을 자극시켰다고 본다. 관객의 입장에서 카호는 토모야에게 공격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어쩐지 토모야가 착해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그녀를 버리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정신승리일 수도 있지만 어떤 지점에서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다. 미적지근한 관계에서 토모야가 돌아서지 못했던 것은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카호를 버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파트너가 돌아오지 않으면 밤새 잠을 설치면서 기다리다가 아침에 쓰려 저 버리고 마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매몰차게 버릴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지점에서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에 토모야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적극적이었다면 카호를 버리고 그쪽에 승부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서 토모야는 떠나자마자 카호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감독은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해 묻는다.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 선택은 무엇을 위함이고 어떠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가, 그 선택의 과정에서 자발성은 충분히 보장받고 있는가 등등.  하마구치 류스케가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도 끈질기게 다루어 왔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선택은 그 어떤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이지만, 미온적인 어떤 것이다. 토모야는 카호를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간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을 쟁취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결국 카호에게 돌아온다. 카호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나오에게 갈 수도 있었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을 버린다고 말했던 토모야를 다시 한번 받아준다. 이 둘은 뜨거운 사랑에 기반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열정'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다른 커플들의 서사 역시 이 둘과 다르지 않다. 밤을 꼴딱 새워가면서까지 다른 곳에서 다른 이와의 관계에 열을 올리다가도  아침이 오면 버스가 되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그들이 원래 위치한 자리, 파트너에게 돌아간다.


  확실히 이 영화는 감독의 이후의 작품보다 젊다.  30대의 하마구치 류스케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세상과 사람을 매우 시니컬하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이 아무리 다른 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봤자 아침이 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무리 까불고 설쳐봤자 인간은 인간이다. 관성을 벗어나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 쉽지 않다.


  반면 '드라이브 마이카'는 이 시니컬함으로부터 조금 더 따뜻해졌다. 중년의 류스케는 인간에게는 관성을 깨뜨리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믿고 있다(https://brunch.co.kr/@narchive/18).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세상과 인간을 조금 더 포용적인 태도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멋진 일이다.


  진실에 대해 다루는 태도도 열정과 드라이브 마이카는 상반된다. 이 영화에서는 진실게임 등을 하면서 진실을 공격적으로 들춰내다가도 아침이 오면 다시 덮는다. 불편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외면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 드라이브 마이카는 회피하던 사람들이 점점 진실을 용기 있게 마주해나가면서 성장한다.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다른 관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롭다. 감독의 의식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라는 생각도 든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런 점에서 탁월한 스토리 텔러이자 끊임없는 성찰을 하는 감독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켄이치로와 토모야 사이의 대화도 매우 흥미롭다. 사랑을 통해 다양한 층위와 세상을 경험한 토모야와 이제야 그 세상으로 나아가는 켄이치로.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도발적이고 파렴치하면서도 부도덕한 일탈까지 감행하게 하면서 수많은 정의할 수 없는 관계를 결속시키기도 한다. 이 결속은 세상에 인정받는 문제와는 또 다른 것인데, 세상이 정한 룰에서만 살아오던 사람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안 되는 사건으로만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이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층위에 도달하게 되고,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사랑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함부로 갖다 대기가 어려운지 알게 된다.

  

  꼭 사랑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그렇다.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 않고 도덕적 잣대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모호한 안개 같은 지점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켄이치로는 이제 막 이 안개의 세계를 경험했다. 그는 안개에 들어가기 전에 토모야를 일방적으로 비난했지만 격렬한 밤이 끝나고 아침이 왔을 때 예전과 같은 세상에 살지 않음을 느꼈을 것이다.


2회 차 관람은 이동진 평론가와 함께했다. 이동진 평론가님 덕분에 더욱더 풍부하게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엔차 관람까지 하게 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든 영화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우리의 밤은 뜨거웠지만 결국 다시 차갑게 돌아서고 말 것이다.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열정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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