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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May 20. 2022

잔인한 감정의 공유, 발굴되어야만 하는 이야기

프란 크란츠의 '매스'를 보고


‘매스’는 프란 크란츠 감독의 데뷔작으로 로튼 토마토 지수 95% 기록했고 각종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우연한 기회에 김영하 작가님이 진행하는 GV시사회 표를 구해 관람하게 되었고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프란 크란츠는 원래 배우라고 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작가와 감독으로서의 야심과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프란 크란츠는 배우로 활동할 당시 주로 조연을 맡아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시작을 의미심장한 조연이 이끌어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매스를 집필했다고 한다.


원제 ‘Mass’는 영어로 두 가지 뜻을 함의한다고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기독교의 미사를 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총기난사 사건을 의미하는 ‘Mass shootings’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시골의 작은 교회로부터 시작한다. 한 여자가 긴장된 표정으로 어떤 장소를 세팅하고 곧이어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와 각티슈 위치며 음식 종류며 예민하게 장소를 점검한다. 그리고 교회로 들어오는 차. 들어가기 싫다는 아내와 이를 바라보는 남편. 관객은 도대체 어떤 만남이기에 이들이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없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 이야기를 몰입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마침내 주인공들이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본격적인 영화, 아니 연극에 가까운 영화가 시작된다. 부부 두 쌍이 마주 보고 있고 이들이 앉은 테이블의 뒤에는 삼위일체를 이루고 우뚝 서 있는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이내 이 방의 문은 닫힌다. 오로지 네 사람만의 공간, 시간이 시작된다. 영화에서 이 넷의 대담은 무려 90분 넘게 진행된다.


왼쪽은 피해자 측 부모, 오른쪽은 가해자 측 부모이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부모와 피해자 부모는 왜 이 외곽의 조그마한 교회에 모였을까? 미국의 청교도적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크리스천 부부들은 신앙의 명령으로 이 불편한 자리에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국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근간이기도 하니까. 가해자 부모 뒤로 놓여 있는 십자가의 성사도 닫힌 문도 매우 종교적인 도상이라고 생각한다. 신은 고통받는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삼위일체를 이룬 듯한 배경이 의미심장하다. 구원은 어디로부터 나올까?


하지만 이들은 십자가의 도상과 점점 멀어진다. 방 안에 있지만 감정적 동요가 커질수록 원래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벗어나 점점 사이드로 옮겨간다. 그리고 더욱더 진솔해진다. 결국 ‘대화’라는 인간적인 수단으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비통함, 슬픔을 해결하고자 한다. 마침내 이 닫힌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은 화해를 하고 다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한다. 이 화해가 완전하다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이 열렸고 그들은 나아가야만 한다.


이 영화가 스토리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할리우드 기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90분을 네 명의 대화로만 채운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라고 본다. 특히 관객을 그 넷의 대화에 존재하게 하고 계속해서 긴장하게 한다는 것은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일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정적 폭발이 언제 일어나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동시에 기다리게 되는 진기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영화의 핵심 주제는 화해와 용서이다. 영화 ‘밀양’이 오버랩된다. 화해를 하러 갔다가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뻔뻔한 가해자의 태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신애라는 인물. 그녀는 용서와 화해가 신의 영역임을 증명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신애의 선택이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매스’는 다른 차원에서 이 화해와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것 역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해와 용서도 결국 삶을 살아내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부모들은 숨을 쉬기 위해, 잠을 잘 자기 위해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당신들과 당신의 아들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들은 불안한 평온을 얻는다. 후에 다시 깨져버릴 평온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서한 자보다 용서받은 자가 더 불편하게 장소를 벗어난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런 법칙들을 목격해왔다. 용서하는 사람은 평화를 얻게 되고 용서받은 자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사실 가해자 부모가 가해자는 아니다. 이들 역시 아들을 잃은 부모이다. 하지만 떳떳하게 사회에 나가서 피해자임을 주장할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의 슬픔은 고립되어 있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실제로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엄마인 수 클리볼드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에서 뉴스를 볼 때 피해자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살아있기를 바랐겠지만 자신은 차라리 아들이 죽길 바랐다고 고백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상황의 다양한 측면, 현실의 복잡성을 보여주고자   같다. , 악만큼 현실을 간편하게 구분하는 척도도 없다. 하지만 이건 진짜 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말을 하는 지금  순간도 복잡하다는 말속에 형용할  없는 많은 감정들과 사실들을   뭉쳐 놓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건져내서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줘야만 하는 것들이다. 아직 개발되고 꺼내 지지 못한 이야기들,  속에 담긴 모순과 아이러니가 너무 많다.


피해자의 부모, 가해자의 부모 이 둘은 간편하게 생각하자면 원수에 불과하지만 결국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 것 역시 아이러니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교회에 온 목적은 증오, 복수심, 치유, 아들에 대한 명예 회복 등 다양한 개인적 동기도 있겠지만 결국 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살아있게 만들고 싶었던 부모의 공통적 목표가 작용한 결과이다. 잔인하지만 이들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피해자 엄마는 마지막에 가해자 엄마를 안아주면서 ‘우리는 아이들이 많이 그리운 거예요.’라고 말한다.


배우 앤 도드, 극에서 가해자 엄마를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희곡은 연기자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상당히 희곡적이어서 많은 부분 연기자들의 연기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모두 훌륭하게 수행해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가해자 엄마를 연기했던 ‘앤 도드’가 인상 깊었다. 영화를 끝나고 따로 필모를 찾아볼 정도였으니까. 미사 플림프, 제인슨 아이작스, 리드 버니 역시 너무나도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폭발시키기보다 그것을 억누르려는 배우들의 연기에서 더 리얼한 슬픔을 맛보고 공감할 수 있었다. 억누르고 참는 와중에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것들이 진심이고 진짜일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본 느낌이다. 대화만으로 이만한 긴장감과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은 자극과 장르적 흥미만 추구하는 영화판에서 또 새로운 활로를 찾아주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글의 맛, 영화의 맛을 되살리는 작업이라고도 생각이 돼서 힘들지만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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