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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03. 2022

사랑 후에 사랑을 명명하는 방식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를 보고..

원제는 'After Love'.  알림 칸 감독의 작품으로 실제 파키스탄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개종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한국 개봉 전에 이미 칸과 영국 독립 영화제, 영국 아카데미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고 영화 '캐롤' 제작진도 참여했다고 하여 화제가 된 작품이다. 실제로 평일 밤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있어 놀랐다. 





저번에 다루었던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븐시스터즈 절벽이 나온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사랑'의 단상에 대해 다루고 있고 사랑의 절망감을 세븐시스터즈 절벽에 비유했다는 점이 신기했다.


영화는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스포 주의). 영국 여자 메리는 남편 아메드를 14살에 만나 사랑을 키워왔고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 종교로 개종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꾸었다. 히잡을 쓰게 되었고 매일 알라를 위해 정성스러운 기도를 올린다. 이슬람 세례식에서 갓난아이의 머리를 면도하는 것을 이해 못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히잡을 쓴 시간이 쓰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길 정도로 오랜 시간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간다. 


메리를 연기한 조안나 스캔런은 이 작품으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에게 남편 아메드란 인생의 모든 걸 변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메드가 죽고 그녀는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메드의 내연녀 쥬느비에브를 찾아가게 된다. 갑작스러운 상실 때문일까, 아메드의 부재에 흔들리던 그녀는 아메드라는 공통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삶을 조심스럽게 염탐하기 시작한다. 


쥬느비에브는 아메드와 만났지만 개종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랑스식 생활 방식 그대로 살고 있으며 히잡을 쓰지도 않았다. 메리는 자신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그녀는 바꾼 것이 없음에 일차적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쥬느비에브가 아메드와의 사이에 솔로몬이라는 아들이 있음을 알게 되자 그 절망의 크기는 더욱 증폭되어 원망과 좌절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쥬느비에브와 메리



영화는 이 절망을 세븐시스터즈가 붕괴하는 모습, 하얀 천장이 무너질 듯이 균열하는 도상을 통해 그려낸다. 메리는 그 하얀 붕괴를 아주 똑바로 쳐다보고 떨고 있다. 그녀는 결코 눈을 감지 않는다. 그 절망을 떨리지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아메드의 영원한 부재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이지만 그 절망의 깊이는 쥬느비에브와 솔로몬을 만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깊어지는 것이다. 하얀색은 정신을 가장 예민하게 자극시키는 히스테릭한 색이고 이 색은 그녀의 슬픔에 대한 좋은 도상이 된다.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친절하지 않다. 관객에게 많은 것을 말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비유, 어떤 도상 혹은 연출적인 측면으로 이야기의 흐름은 물론이고 메리의 감정선을 보여주고 있어서 관객이 '직감'하도록 한다.  드라마와 다른 영화의 맛이라는 생각도 든다. 드라마는 눈을 감아도 대사를 통해 이야기를 알 수 있지만 영상 미학이 중요한 영화에서는 많은 지점이 내러티브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내러티브의 삭제는 요즘 영화의 트렌드이기도 한데, '파워 오브 도그', '드라이브 마이카' 등 할리웃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들도 대부분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영화를 느끼게 된다.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대본을 넘어선 연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메리는 결국 클라이맥스 순간에 자신이 누구인지 솔로몬과 쥬느비에브에게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끝내 쥬느비에브는 다시 메리를 만나러 영국에 솔로몬과 함께 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메리가 했던 것처럼 메리의 집에서 아메드의 흔적을 발견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아메드를 공유한 셋은 그의 상실에서 비롯된 슬픔을 함께 공유하기 위하여 연대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망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구원이 되는 존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더럽게 얽혔지만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서로.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점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것 그 후에는 완전한 단절, 절연이 있는 게 아니라 슬픔이 있고 애도가 있고 원망이 있으며 이것으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사람과 얽혀 서로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웃기도 한다. 모든 단상은 명확하고 심플하지 않다. 오히려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메리는 아메드가 남긴 음성메시지를 계속해서 들으며 그의 부재를 실감함과 동시에 상실을 위로받는다.


사랑은 이 복합적 양상의 끝판왕이다. 사랑에는 따뜻함과 애정도 있지만 그에 비례하는 절망과 원망도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미워한다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경우에 성립할 수 있는 명제인 것이다. 메리에게도, 쥬느비에브에게도 아메드와의 사랑은 그러하였다. 


하지만 메라와 쥬느비에브 그리고 솔로몬은 세븐시스터즈 절벽으로 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메리가 아메드를 그리워하던 그 장소로, 아메드가 위험하다고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했던 그 장소로. 그립고 사랑하는 그의 목소리가 담긴 그 장소로 셋은 나아간다. 아픈 연대라는 생각이 든다.  아메드가 남긴 상처에 아파하고 원망도 하면서도 그가 남긴 솔로몬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위해 이 두 여인은 기꺼이 그와의 사랑을 사랑으로만 남기기로 결단한 것이다.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각자가 한 그 절절했던 사랑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보다 한 차원 높은 선택을 했다고 본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말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방황 등을 잘 표현한 솔로몬 역의 배우 탈리드 아리스



그것은 사랑 후에 두 여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대처이자 각자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고 예의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랑을 어떻게 명명하는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떻게 지나간 사랑에 이름 붙일 것인가? 그것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결정인가? 결국 내 인생을 위한 최선의 방향으로 우리는 사랑 후에 사랑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까? 메리와 쥬느비에브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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