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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Mar 07. 2022

끝내 이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은건 아니니까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보고

2019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개봉한 영화이지만 한국에서는 2022년 개봉했다. 우연히 홍보 영상을 보고 예매하여 보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러닝타임이 100분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주말을 마무리하면서 보기에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곡 'The Retreat from Moscow'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원제는 'Hope GAP'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감정의 동요를 많이 일으키는 영화였다. 남편이 떠나고 괴로워하는 아내, 그걸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남편, 엄마와 아빠의 헤어짐과 상실에 마음 아파하는 아들. 우리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들로 점철된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29년 차 부부는 위기를 맞았고 남편은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며 일요일 오후에 떠나버린다. 아들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그리고 상실에 몸부림치는 엄마를 지켜주려 한다.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야기는 끝난다.  사실 이 영화는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 구조상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감정의 절정에 치닫게 한다.


아마 인물들이 하는  내레이션(방백: 관객에게만 들리고 영화상 인물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방백은 주인공의 감정을 가장 일차원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인데 흔히 세련된 영화일수록 방백이 없거나 적다고 한다. 사실 주인공의 생각, 감정을 은유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모든 예술의 목적이기 때문에 대놓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백이 아주 적절하게 잘 쓰여있고 농도 깊은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방백은 영화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연출기법이기도 하다. 만약 연극이었다면 방백이 많은 경우 매우 지루할 것이며, 장면 전환이나 이런 부분 등에서 매끄럽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방백이 있어도 이 영화와 같이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주인공들이 대사에 맞는 배경에 천천히 걷게 한다는 식의 방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잘만 사용한다면 아주 요긴한 장치가 된다.


이 영화는 방백이라는 장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아들인 제이미의 독백 그리고 남편인 에드워드의 독백으로 말이다. 다만, 끝끝내 아내인 그레이스의 마음은 우리가 직접 들을 수 없고 그녀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인 그레이스가 많은 부분을 직접적인 대사로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고, 그녀의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를 잡아보지만 다른 지점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차를 끓일 뿐이다. 에드워드에게 차는 도피였고 그레이스에게 차는 에드워드의 사랑과 보살핌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는 사랑이라 믿었던 것의 상실을 드러내고 이 상실에 아파하는 사람이 그레이스다. 그녀는 남편이 평생토록 자신만을 사랑할 것이라 믿었고 그에게 사랑을 강요하지만 끝끝내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그가 떠났을 때 일명 '슬픔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를 시전 하며 이름은 '그레이스'이지만 우아함을 잃어가기도 한다. 사랑 앞에 장사가 없다고 그녀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매달리고 돌아오라고 협박하고 그를 그리며 쪽지를 써두기도 한다. 그 어떤 사람이 사랑 앞에, 더군다나 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쿨할 수 있을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감정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처연한 감정이기도 하다.


제이미 역시 엄마의 이러한 감정에 유난히 마음 아파한다.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말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돌리며 눈물짓는 제이미의 모습은 이 처연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연기이다. 제이미를 연기한 조쉬오코너가 노련한 배우들 틈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그 상황에 보여줄 법한, 아니 그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어떤 리액션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기가 좋으면 배우가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조쉬 오코너의 경우가 이 영화에서 그랬던 것 같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레이스는 남편과 29년을 함께 살았고, 결혼은 신 앞에서 굳건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 믿는 인물이기에 남편의 외도와 일방적 통보에 의한 헤어짐은 정말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반면 아들인 제이미는 엄마를 위로하고 깊이 공감하면서도 생각보다 쉽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어찌 보면 낯설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제이미가 사랑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20,30대 미혼의 사랑은 대부분이 그렇듯 아주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어제 사랑했던 사람이 오늘 다른 인연을 만나 나를 떠나갈 수도 있고, 내가 오늘 사랑했던 사람이 나의 선택으로 멀어질 수도 있다.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에 우리는 헤매고 있고 제이미 역시 그러하다.  많은 기혼들이, 혹은 안정적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겠지만 '유동성' 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그레이스는 29 동안이나 사랑의 본질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사랑이 변할  있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도 결혼을 통해 제거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는 결혼이 결코 사랑의 영원함을 보증하고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상관없이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정도의 관심과 아늑함, 존중을   사랑도 결혼도 유지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의 원제가 'Hope Gap' 인지 드러나는 지점이다.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조쉬 오코너, 더 크라운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Gap은 아들인 제이미와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레이스는 제이미가 집에 자주 오기를 바라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에드워드가 떠났을 때 강력히 그를 설득해 집에 데려와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제이미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고 둘 사이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상처받았고 원망스럽지만 이미 회복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엄마와 아빠가 하루빨리 상처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그의 성숙한 태도는 그레이스의 절망과 상실감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기도 하지만 끝내 그녀를 회복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서 홀로 서 있는 그레이스에게 절벽은 마치 자신과 같았을 것이다. 땅이 끝나고 무지막지하게 낙하하면 망망대해의 바다가 있는 절벽은 꼭 그녀의 처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 끝에 다다르자 제이미는 황급히 달려가고 그녀를 불러 세우며 이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아야 나 역시 그 뒤를 밟아 위로를 얻고 살아갈 힘이 날 것이라 말한다. 제이미 역시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상실과 아픔, 슬픔이 있었고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엄마가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곧 자신의 극복이라 느꼈을 것이다.


아네트 베닝의 표정과 세븐시스터즈 절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  장면을 통해 그레이스는 슬퍼하지 않고 수용의 단계로 흘러간다. 제이미 역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길게 엄마에게 말을 하며 그녀를 이해하고 또 그녀를 돕는다. 모자에게 이 일은 어떤 변곡점이 된 것이다. 플롯에서 이를 '전환점'이라 하는데 전환점을 통해 주인공의 태도는 180도로 변하게 된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며 절벽은 더 이상 절망과 낙하의 장소가 아니다. 파라슈트를 얻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가는 좋은 장소로서 절벽이 작용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이 풍경도 점점 다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에서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태양은 서쪽에서 아주 느리게 떠오르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전환점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진 않지만 인물들이 상처가 할퀸 슬픔에서 점점 수용의 단계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Gap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 Gap은 결코 절망의 상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Gap 때문에 결혼이 깨지고, 상대에 대한 실망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이 Gap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보상도 주어진다. 제이미가 그레이스에 기대에 부응하는 위로를 처음에 해주지 못했지만, 그의 성숙함이 결국 그레이스를 일어나게 했고 시인으로서의 그녀의 일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또한 에드워드 역시 평생토록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원하는 삶에 대한 지향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게 된다. 어쩌면 더 충만한 인생을 위한 기대의 어긋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사랑도 그렇다. 늘 자주 어긋난다. 사귄다, 결혼한다 등의 말과 행위로 이 어긋남을 잠시 정방향으로 바로잡아보려 하지만 끝끝내 다시 자주 어긋나고 만다. 기대는 늘 충족되기 어렵고 어떤 선을 넘어가면 상대방이 결코 채워줄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어긋남, 서로 간의 기대의 차이를 통해 나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이별은 아프지만 이별 후의 삶은 더 충족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이 끝난 후에 나 자신이 보이고 나 자신을 비로소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각자가 지닌 사랑의 아픔을 공유하며 더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길 다짐하는 그레이스와 제이미


그렇다면 사랑이 무용한 것일까? 나는 이 영화가 결코 사랑의 무용함을 보여주기 이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가치에 대해 그리고 있는 영화다. 그레이스는 에드워드에게 우리의 좋은 시절의 기억까지 망치게 하지 말라며 헤어지지 말 것을 종용하는데, 생각해보면 그와 헤어지건 헤어지지 않건 좋은 시절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가 상처를 갖게 되면 그 기억이 주관적으로 곡해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그 시절에 좋았다. 그 시절에 정말 상대를 사랑했고,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였으며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간'의 감정에 대해 너무나도 야박하게 대우한다. 꼭 영원해야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다. 순간의 사랑도 사랑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본질에 충실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아들에게 그레이스와 나는 본디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기차에서 운명적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기차에서 에드워드가 바라보지 못한 상처까지 보듬어준 사람은 그레이스였고  그 순간에 그녀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 영원한 사랑의 난제이겠지만 동시에 신의 영역에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신념은 ‘순간도 사랑이고, 순간도 영원이 있다’는 사실 하나이다.


끊임없이 헤어지고 만나고 끝끝내 다른 사람과 이어지겠지만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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