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의 어느 날, 인화원 교육이 끝난 나와 동기들은, 새로 산 양복을 입고 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마치 군대에서 신병을 인수하듯이, 내 동기들은 하나 둘씩 데리러 온 사수들과 함께 각자의 팀으로 향했다. 나와 동기도 설레는 마음으로 사수를 따라 내가 속한 팀으로 가 상무님과 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부여 받았다. 빈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 놓고 멍하니 몇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연구실(Fab)에서 실험을 마치고 온 막내 선배가 나에게 와 앞으로 할 일을 알려준다
앞으로 치율씨가 매일 할 일은, 이 폴더에 있는 엑셀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서 복사/붙여넣기 하는 거에요.
해당 폴더에는 실험한 반도체 소자의 특성들이 담긴 엑셀 파일이(csv 파일이었으나 당시에는 csv 파일과 xls의 차이점도 몰랐다) 수백개가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엑셀 파일을 하나씩 열어 복사한 뒤 하나의 통합 파일로 붙여 넣는 것 이었다. 통합 파일은 무거워져서 한달에 한번씩 새로 만들어야 했고, 복사해야 할 파일을 건너 뛰거나 똑같은 파일을 두번 복사하는 등의 실수가 많이 나왔다. 그나마 이런 작업도 단축키를 써서 키보드만을 작업 한다고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리석은 방법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은 문외한 이었다. 또 엑셀에서 VBA가 가능하다는 것도 몰랐다. 당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한 방법은 교보문고에 가서 엑셀 관련된 책들을 사서 읽고 함수를 사용해 자동화를 하는 것이었다.
함수를 이용한 방법은 가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방법을 찾지 못해 낙담하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엑셀 책 저자에게 이메일로 자문을 구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방법이 가능한 지를 물었다.
원래 질문 받은 내용을 직접 대신 해 주지는 않지만, 신입사원이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보여서 VBA 코드를 짜서 보내 드립니다. 한번 실행시켜 보세요.
생전 처음 엑셀에서 Script형 코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보내주신 파일에 실행 버튼을 클릭하니 최소 30분이상 걸리던 일이 10초안에 해결되었다. 이 같은 방법은 타이포나 휴먼에러도 없고 파일갯수의 제한도 없었다. 말 그대로 나는 신세계를 보았고, 이후 엑셀 VBA에 대해 공부하면서 첫 Script형 코딩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몇 시간이 걸일 일들을 단 몇 분만에 가능하게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부서 내 엑셀 담당자가 되면서 더 많은 일과 더 많은 시간을 데이터 분석에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