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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l 26. 2018

뚜르 드 해바라기

프랑스



처음부터 해바라기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애초엔 니스에서 A7 도로를 타고 리용까지 한 번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다섯 시간 거리를 미리 운전해 놓으면 다음 날 파리까지 가는 일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니스에서 한 시간도 채 달리지 못한 에서 나는 자전거 행렬과 부딪히고 말았다.      


해마다 프랑스 여름을 시끌벅적하게 달구는 뚜르 드 프랑스. 자그마치 3500킬로미터를 3주 동안 달리는 자전거 경주. 서울-부산을 네 번 왕복하는 고생을 왜 해마다 하는 건지. 매 구간 죽자고 달리는 선수만 200여 명. 거기다 지원팀, 방송 차량, 응원단을 합치면 어떤 곳은 따라붙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는 매머드급 행사이다.

 

1903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도로 사이클 대회. 매년 7월에 3주 동안 프랑스와 이웃나라를 달린다



마주치는 게 한두 번이면 모를까. 여행자에게 이런 대회는 갑지 않다. 빠듯한 일정에 딴죽을 거는가 하면 저녁에 머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편안한 숙소는 물 건너가고, 동네 마트에 생수마저 동이 난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여행 동선을 바꿀 수밖에. 나는 메뚜기 떼의 습격과도 같은 자전거 행렬을 피해 엑상 프로방스를 멀찍이 우회하기로 했다. 그러다 발랑솔의 샛노란 해바라기 무리를 떠올렸다.


발랑솔(Valensol). 마르세유에서 론강을 따라 아비으로 가는 길에 숨은 마을. 지도에도 잘 나타나질 않아 GPS에 지명 대신 위도와 경도를 넣어야 하는 곳. 그 발랑솔을 향해 운전대를 틀었다. 다시 한번 해바라기밭을  싶서였. 운전석 계기판에 "You need a rest!" 라는 경고가 뜰 때쯤 나는 천천히 큰 도로를 벗어났다. 마을 초입의 해바라기은 정신 차려 사잇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지나치기 상이다. 벤더밭으로 몽땅  버리기 전에 다시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발랑솔 인근 해바라기밭 사이를 달리는 자전거 바퀴 행렬



고흐가 사랑한 발랑솔의 해바라기. 그들은 바람 부는 대로 후드득후드득 황금물결을 만드는 중이었다. 나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휘적휘적 밭고랑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황황했다. 생폴 정신병원에 갇힌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루가 지난 해바라기는 제 모습을 잃어버려. 이른 아침 발랑솔에 다시 갈 수 있다면…" 하면서 여기를 그리워했다. 테오는 고흐가 평생 사랑했던 동생이자 마음을 나눈 유일한 친구였다.     


산책을 좋아하던 소년, 빈센트 반 고흐는 교회 뒤뜰에서 자기 이름이 붙은 묘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의 무덤이었다. 잃은 아기를 잊지 못한 목사 아버지는 나중에 태어난 동생 고흐에게 똑같이 빈센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흐는 그때 묘지 옆에 핀 해바라기가 자신을 보고 "나는 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묻혔다



그날 이후 고흐는 해바라기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고 틈날 때마다 화폭에 옮겼다. 아를에 머무는 15개월 동안 고흐는 해바라기를 일곱 작품이나 그렸다. 열다섯 송이를 그린 게 세 점, 열두 송이 두 점, 다섯 송이와 세 송이를 한 점씩 그렸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 깊이 평화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는 해를 보며 자란다. 아무 데서나 잘 지만, 양지바른 곳에서는 키가 2미터까지 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이 2천 년 전 처음 재배했다. 콜럼버스를 따라 스페인으로 건너가 '태양의 꽃'으로 불리며 이곳, 남프랑스까지 퍼졌다. 

'꽃이 항상 해를 향한다'고 알려져 있 실제는 어릴 때만 햇빛을 따라다닌다. 해가 뜨면 일제히 동쪽을 바라보다가 점점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건 '옥신'이라는 성장 물질이 빛을 덜 받는 쪽으로만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늘진 쪽만 빨리 자라 몸을 해 방향으로 구부리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이걸 멈춘다고 한다. 꽃이나 사람이나 머리 커지면 제 멋대로인 모양이었다.


 

르노 캡쳐를 빌렸다. 언제나 여행하는 그 나라에서 만든 자동차를 타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고흐 생각 때문인지 해바라기밭이 숙연해졌다. 바람이 고랑 사이로 달아나고, 시간은 속도를 늦췄다. 나는 그만 하염없어져 정적 속으로 주저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랑을 마친 개똥지빠귀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침묵을 깼다. 두런두런 금발 모녀 관광객이 다가오는 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아내가 나를 찾고 있었다.


해바라기하면 사람들은 영화 '해바라기'나 고흐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해바라기가 지천인 산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어일리. 동네 어른들이 '기화'라고 발음하던 마을
. 발랑솔의 해바라기밭이 마을 초입을 빼닮았다.   


1970년대 초반, 경주에서 감포행 버스로 하루 종일 걸리는 오지. 지금은 쇠락해 버린 규화에서 나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사람 등에는 가려워도 팔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대한민국에선 규화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葵花)가 해바라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은 다 큰 후에 알았다. 일제가 기름을 짜 전쟁물자로 쓸 요량으로 '지무시' 트럭에 피마자며 해바라기를 실어 날랐다고 했다. 옛 소련에서 개발한 품종은 씨앗의 50%가 기름이었다. 



해바라기는 줄기가 굵어지면 더는 해를 따라 몸을 돌리지 않는다. 식물도 머리가 커지면 제멋대로 다


아버지는 몇 년째 외국에 나가 있었고, 어머니는 처녀 때부터 초등학교 선생님을 했다.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어머니는 교실 앞 화단에 줄 맞춰 해바라기를 심었다. 농번기 이른 여름방학으로 텅 빈 운동장에는 호위병마냥 해바라기들의 그림자만 술렁거렸다. 중간소집일에 아이들이 등교하면 어머니는 해바라기 씨를 한 주먹씩 꺼내주었다. 발밑엔 허리를 질끈 동여맨 개미들이 우리가 흘린 씨앗을 부지런히 운동장 끝으로 옮겼다.   


고추잠자리가 빙빙 선회를 시작하면, 그걸 신호 삼아 해바라기는 씨를 여물었다. 학교에선 미군에게 원조받은 탈지분유를 끓여 '벤또' 뚜껑에 부어줬다. 가끔씩 밀가루 중력분을 섞어 만든 옥수수 빵도 나왔다. 옥수수수염이 붉은 갈색으로 바뀔쯤 담임 선생님들은 가가호호, 가정방문을 떠났다. 어머니는 오전 수업을 부리나케 마치고, 빨아놓은 하얀 운동화를 신고 아이들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태풍 낸시가 손톱을 세워 마을을 할퀴고 지나간 그해, 매미 소리처럼 해가 짧아진 늦여름이었다.


그날따라 어둠이 빨리와 동생과 나는 마을 입구 해바라기밭까지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한참 전에 해가 졌는데도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3학년이었고, 동생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마침 달도 숨어버려 해바라기끼리 툭툭 부딪치는 소리에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는 어둠이었다. 밤길을 비출 '전짓불' 같은 건 없었다.    



해바라기 밭에 고추잠자리가 선회하면 그걸 신호삼아 해바라기는 씨를  여문다



손을 잡고 걷던 동생이 갑자기 "쉬잇"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 풀에 나도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둠 속으로 무언가 보였다. 스무 걸음쯤 앞 버려진 무덤 위에 시커먼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해바라기 줄기 뒤로 몸을 숨겼다. 눈을 부릅뜨고 봐도 도무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고양이라고 하기엔 컸다. 숨을 죽였다. 더 놀라운 건 도토리만 한 빨간 불이 나지막하게 타올랐다가 스르륵 꺼졌다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벌렁벌렁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도깨비인가.


나는 동생더러 돌멩이를 집으라고 속삭였다. 동물이든 귀신이든 돌을 던져 쫓아버릴 생각이었다. 한 번에 맞혀야 했다. 동생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소리로 하나, 둘, 셋을 세었다. 우리는 "이얍"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돌멩이를 힘껏 내던졌다. 작은 주먹만 한 크기였다. 그러자 "꺄악" 하는 괴성과 함께 갑자기 불이 '쑤욱' 하늘로 치솟았다. 우리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해바라기 몇 그루가 사정없이 등 뒤에서 무너졌다.


어스름한 빛에 후다닥 줄행랑치는 무엇인가가 드러났다. 그 뒷모습은 동네 거렁뱅이였다. 정신이 반쯤 나가 마을 주변을 배회하다가 빈집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외진 곳에서 부녀자들을 희롱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후줄근한 사내가 무덤 위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를 맞고 벌떡 일어선 모양이었다.



기억 속 한밤중 마을 어귀의 해바라기밭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입에 문 담뱃불이 쑥 하고 공중 부양을 한 것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에게 닥쳤으면 얼마나 놀라셨을까. 우리가 먼저 발견하고 쫓아버린 게,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동생을 잡아 세워 바지에 묻은 흙을 털었다. 살랑바람이 불었다. 어두웠던 해바라기밭이 조금 환해졌다. 그때 멀리서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 머 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소리 지르며 달렸다. 쪼끄만 동생이 나보다 더 빨랐다. 어머니도 우리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우리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아까 부랑자가 앉았던 무덤을 지나 어머니와 마주쳤다. 우리는 양옆에서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펄쩍펄쩍 뛰었다.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우리 둘을 꼬옥 껴안았다. 얘들아, 하고 어머니가 말했을 때 심장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심장의 따뜻한 말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어깨 가방을 받아 들었다. 동생 먼저 챙기는 어머니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어머니는 동생을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키가 쑥 자라는 느낌이었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 양손을 한 쪽씩 나눠 잡고 씩씩하게 해바라기밭 사이를 헤쳐 걸었다. 집까지 오는 밤길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동생은 장터교회 여름성경반에서 배운 찬송가 후렴을 반복해서 불렀다.



백미러와 해바라기.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사물이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순간 구글 내비가 끼어들었다. 남프랑스 밤길 운전으로 그만 돌아오라는 경고처럼.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누군가 생각의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립감이 좋다고 소문난 르노 캡처에서 주르륵 손이 미끄러졌다. 핸들을 고쳐 잡았다. 백미러 속에는 달빛 아래 해바라기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쏟아져 들어오는 쨍한 노란색.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곧 추석이다. 올해도 어머니를 뵈러 산소에 간다.


어머니는 주머니가 양쪽에 달린 평상복을 입고, 귀퉁이가 말린 까만 몸피의 개역 <성경젼서>를 안고 돌아가셨다. 여름이 오자 산소 아래 해바라기가 피었다. 동생은 어머니 주머니에 있던 해바라기 씨앗이 싹을 틔운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해바라기처럼 키가 크셨던 어머니. 소식 뜸한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도 해바라기를 닮았었다. 규화도 잘 있겠지. 정미소 담벼락에 햇볕은 따뜻할까. 면사무소 앞 공굴다리는 세멘 포장이 끝났으려나.

 


비가 내리면 차창 밖  풍경이 번진다. 비 때문인지 추억 때문인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가 치켜든 상향등을 황급히 내렸다. 불빛이 눈을 찔렀는지 유리창이 번들거렸다. 가속페달을 밟자 차는 어둠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들어갔다. 전조등을 쏘아보지만 몰려오는 안개는 불빛을 산란시켜버린다. 가슴 횡격막 위로 묵직한 게 올라와 목울대가 뻑뻑해졌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곤 눈꺼풀을 깜박여 뜨뜻해진 눈시울을 식히느라 안간힘을 썼다. 아내는 미동도 없이 잠이 들었다. 이제 해바라기는 평생 내 마음속에서 자란다. 고흐 이랬을까. 동생은 또 어떨까.

도로는 오가는 차가 한 대도 없어 적막했다. 근데 해바라기 꽃말이 뭐였지, 나는 불쑥 혼잣말로 물었다. 그 아내가 들을세라 얼른 속으로 대답했다. 해바라기는 꽃이 아니잖아. 그래, 해바라기는  이상 꽃이 아니다. 내게 해바라기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란 '그리다'와 '울다'가 합쳐진 말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다. 차창 밖이 물기에 젖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전거 행렬을 따라갈걸 그랬나 싶었다. 옆자리 아내는 내 수선스러움을 모른 척하는 게 틀림없었다.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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