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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Oct 03. 2018

리스본 편지, 당신은 안녕한가요

포르투갈



페소아.
당신의 책 <리스본 Lisbon>을 들고 포르텔라(Portela) 공항에 내렸습니다. 누군가의 책을 읽고 거기에 쓰인 도시를 찾는 건 처음입니다. 책이 이곳으로 이끈 건지 리스본이 당신을 읽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당신이 익숙하지 않고 책도 읽기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던 그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서울을 떠나 왔음에 이토록 안도하고 있으니까요. 늦은 시간 낯선 공항. 우버 택시를 불러놓고 주차난간에 걸터앉아 당신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서울에서 리스본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다. 어딘가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이 리스본이다


페소아.

지난여름은 유난히 모질었습니다. 111년 만의 더위가 있었고 열흘 전 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명절이 가까워져 달은 차는데 할 일을 잊었습니다. 더 허망해지기 전에 무엇이든 저질러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파리까지 11시간. 밀린 빚을 갚듯 잠을 잤습니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공항에서 리스본행 비행기로 바꿔 탄 후에야 당신의 책이 생각났습니다.


피레네산맥(Le Pyrenees)을 넘었습니다. 고도 1만m 시속 9백km. 빌바오(Bilbao) 상공을 지날 때쯤 잠든 아내에게 빌려준 어깨를 빼 독서등을 켰습니다. 에어프랑스 JOON Air 16열 C석. 노란 불빛이 앞좌석 등받이에서 펼친 기내 식탁 위에 원뿔을 만들었습니다. 핀 조명이 만든 한 뼘 크기  지름 안에서 당신의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피곤하여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을 테다.'


잠깐 멍해졌습니다. 그리고 곧 숨이 멎었습니다. 아끼는 펜을 꺼내 진하게 밑줄을 쳤습니다. 당신이 설령 포르투갈어로 썼다 해도 나에게 왔을 문장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오면 늦은 시간에 도착한다. 여행자에게 포르투갈은 리스본의 밤 풍경이 첫 이미지가 된다


오래전 빌 어거스트 감독이 만든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를 보았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같은 건 줄 알고 올레tv <선택> 버튼을 눌렀지요. 제레미 아이언스가 스위스 베른에서 고문헌학을 가르치는 중년 교사 나왔습니다. 비 오는 아침 출근.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날려 베른교에서 뛰어내리는 젊은 여인구합니다. 학교까지 데려와 구석에 앉혀놨던 그녀는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벗어둔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포르투갈어로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책을 흔들자 15분 후 떠나는 리스본행 열차표펄럭 떨어집니다. 베른역으로 그녀를 찾아 줄달음치는 그레고리우스.  떠나는 리스본행 열차 주변을 허둥대다 그만 자신이 올라탔습니다. 신을 차린 그는 책을 펼쳐  문장을 발견합니다.

'인생이 삶의 여러 부분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유럽에선 일찍 줄을 서서 빨리 타야 머리 위 공간을 차지한다. 안 그러면 내 가방이 한참 떨어져 실린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습니다. 나중에 읽었지만,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당신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 그레고리우스의 심정이 놀랄 만큼 닮아서였습니다. 다음 대사는 더 충격이었습니다.

'인생의 진짜 감독은 <우연>이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건 꼭 화려하거나 멋진 사건 은 아니다. 조용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순간이 당신의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이 준 울림을 기억했습니다. 언젠가 리스본으로 가서 살아내지 못한 내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페소아 당신의 또 다른 이름이 혹시 그레고리우스는 아니었는지요.



페소아는 날카로운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졌다


페소아. 
책날개에서 글쓴이 프로필을 읽었습니다. 당신은 여기 리스본에서 태어났더군요. 5살 때부터 의붓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자랐고요. 리스본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돌아와 47살에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이곳에 살았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70명이 넘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글을 썼고요. 필명이나 가명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완벽한 타인으로 변신하였더군요.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한 해양 엔지니어 알바루 드 캄푸스. 목가적인 시인 알베르트 까에이루. 리카르두 레이 등등. 이렇게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나에 갇힐 뻔한 수많은 나를 해방시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당신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 이유도 다양한 페르소나 때문이라면서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나 봅니다.



리스본은 아직 트램과 자동차와 사람이 도로를 함께 쓴다


페소아.
당신이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더반 생활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세월얼마나 녹록지 않았을지 작합니다. 스물일, 토로(Motorola)에서 밥벌이를  시작했을 때 나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닮은 중년 여인의 뒷모습을 쫓아 종일토록 거리를 헤매는 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새벽녘 2층에서 머리를 감다가 바람이 대문을 흔들어 만든 기척에 놀라 뛰어내려다 계단을 굴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면서 우리 삼 형제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챙길 형편이 못되었기에 기약조차 없었지요. 나는 가까스로 직원 숙소가 있는 직장을 찾아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동안은 '의붓가정'이니 '모친별세' 같은 말을 맨 정신으로 읽지 못했습니다.



잠들지 못하던 수많은 시간. 카메라는 친구가 되었다


언젠가 이런 글도 썼습니다. 내 딴에는 의연한 척 절제했지만, 행간은 젖어 축축합니다. 깊었던 불면의 밤.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헤짚으면 온몸을 웅크린 채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흘렀다. 깊고 푸른 강물 속에는 미움, 애증, 후회, 편집, 고독, 원망, 설움 따위의 이름을 지난 회색빛 물고기가 들끓었다. 나의 이십 대 후반은 그런 물고기와의 피로한 싸움으로 늘 힘에 부쳤다. 밤을 새워 물고기를 잡아도 잡아도 다시 어둠이 내리면 내 의식의 강에는 비슷한 이름의 화석 같은 물고기만 가득 차곤 하였다. 기억해 보면 아 그때도 동이 텄던가. 냉기 돌던 마포구 용강동 직원 합숙소의 새벽녘 베갯머리는 왜 그리 칙칙한 미망으로만 얼룩져 있었는지(....)'



나는 꿈꿨다.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거라고


페소아.
당신의 책에 깊숙이 빠져듭니다. 그러나 당신이 귀띔 해준 장소를 일일이 찾아진 않으렵니다. 리스본이 서울처럼 휙휙 변하지 않기에 많은 곳이 당신이 살던 그대로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리스본에 왔으니 엉거주춤 이곳저곳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어디든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어디도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어디라도 좋다'는 체념에 이르렀습니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욕심이 무너졌습니다. 무슨 유적을 찾기 위해 가고,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가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가우디를 뺀 바르셀로나. 에펠탑 없는 파리 생각해 봅니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동선이 아니라 생각을 지워버린 채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드디어 호기심이란 약발도 다 떨여행으로도 달랠 수 없는 허기가 찾아온 게 아닐까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페소아 동상. 지금도 그는 카페 브라질리아 앞에서 행인들에게 자리를 권한다


페소아. 

나는 여기서 허튼짓만 할 작정입니다. 가성비가 형편없는 선택. 효용성이 바닥인 행위. 시간을 낭비하는 탐닉 말입니다. 힐링이니 치유라는 말은 또 얼마나 식상한지요. 이제 나는 아무런 목적 없는 사람입니다. 이유도 다짐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아버지와의 관계도 덜어낼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업은 가족의 죽음을 통해 배우는 것이라죠.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내게 되돌아와 상처로 남은 말들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 든다는 게 살아온 결과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거라면 나는 또 어떤 청구서를 받게 될까요.


페소아.

리스본에서 나는 게으르고 단순해지겠습니다. 시인 신현림이 썼듯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나를 사랑하기 가장 좋은 날'이 다가왔다고 느낍니다. 그리하여 이 여행을 마칠 때쯤 떡하니 의연해진 내가 기대됩니다. 3kg 정도 빠진 체중으로 일하다 말고 다시 새로운 여행을 구상하겠지요. "거봐. 모두 괜찮아졌잖아" 라고 지금의 나에게 미리 말해주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토닥여 주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우버택시는 실리콘밸리보다 잘 듣는다


부르르르르-

길게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조나단. 39 82 SA54. 포드 Focus" 막 도착한 우버 택시니다. 페소아. 나는 그만 당신의 책을 덮습니다. '삶이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라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었습니다. 책속에 리스본행 열차표는 없지만 이곳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인생이란 준비 없이 맞닥뜨리는 쪽지시험의 연속입니다. 풀었다 싶으면 또 다른 질문이 눈 앞에 다가오지요. 이젠 애써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운 과제는 먼 미래로 미뤄놓기로 했습니다.


페소아.
당신도 그만 페이지를 가득 채운 힘든 생각들을 잊어 버리세요. 그럴 시간입니다. 수많은 다른 이름의 페소아와 소심하고 겁 많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편안해질 거라며 안부를 건넵니다. 하여 당신에게 또 나에게 다시 묻습니다.


"페소아. 당신은 안녕한가요"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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