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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n 11. 2018

베네치아, 기차를 놓치면

이탈리아




망했다. 비발디를 놓쳐버렸다. 분명 오늘인 줄 알았는데 어제였다니. 35유로씩인데. 돈이지만 공연을 놓친 게 더 큰일이었다. 아내를 어떻게 달래지. 이따가 입장권을 현장에서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을텐데. 내게 이런 실수는 드문 일이다. 잠이 쑥 달아났다. 꼼지락대던 발가락에 힘을 줬다. 종아리에서 허벅지까지 몇 가닥 힘줄이 지퍼를 채우는 것처럼 주르륵 닫혔다나는 '윗몸 일으키기'하는 홈쇼핑 모델처럼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어젖혔다. 여기는 새벽 거리 풍경을 보는 게 압권이라는 베네치아힐튼 12층. 메스트레 역을 빠져나간 기차가 안개 속으로 몸뚱아리를 막 집어넣고 있었다. 그마저도 영 마뜩잖았다.


베네치아는 비발디의 고향. 산비달(San Vidal) 성당은 여름 몇 달 동안 비발디를 연주한다. 비발디는 아내의 플레이 리스트 맨 위에 있다. 토스카나에서 돌로미티로 올라가는 .  곳을 찾던 베네치아로 향했다. 비발디 때문이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를 베네치아에서 만난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여행 중에 보는 공연은 언제나 색다르다. 내게 여행은 압축된 세상을 경험하는 일. 공연은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세상으로 작은 여행을 데려간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어떻게 수습. 나는 머리를 싸맸다.



악단 이름은 Interpreti Veneziani 번역하면 '베네치아인의 대변자' 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다짐으로 보였다.


바포레토를 타고 아카데미아 정류장 다. 여기서 5분 거리 산비달 성당 아침 일찍 문을 다. 사정이나 해볼 참이었다. “기차를 놓쳤다”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어제는 오지 못했다”고. 클레아(Clea)란 이름직원은 난감해했다. 예약한 종이를 들이밀자 윗사람에게 물어보겠다며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녀가 프린트물을 흔들며 나타났다. 경쾌한 발걸음에서 좋은 답을 얻은 티가 났다. 웃으며 되돌려준 종이 휘갈겨 쓴 손 글씨. "OK. You may come tonight." 나보다 더 기뻐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덧붙였다. "오늘 저녁은 《4계》예요. 비발디 레퍼토리 중 최고죠."


성당 한가운데에서 참새가 지저귀었다. 현악 7중주가 만드는 봄. 조각상도  기울였다. 시냇물 소리가 차츰 굵어지더니만 목동이 여름을 몰고 나타났다. 한바탕 난리를 치는 천둥과 번개. 산울림 같은 에코가 휘발하고, 목욕탕 습기처럼 리버브가 자욱했다. 비릿한 여름 냄새의 끝자락. 검은 옷을 입은 일곱 명의 연주자 시에 악보를 넘겼다. 가을이 시작됐다. 낙엽처럼 뚝뚝 한숨을 구는 사람들. 무대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나는 연주자의 호흡에서 하얀 입김을 보았다.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자신의 연주에 빠져 있는 가운데 첼로 연주자는 페르시아 양탄자를 타고 날아온 마법사 같았다.


성큼 떨어진 체감온도에 아내는 오래 참았던 기침 했다. 곡 후반 라르고에선 바이올린이 독주에 나섰다. 앞자리 노부부의 팔뚝에 링거 핏줄이 파랗게 일어섰다. 바이올린 선율에 모두  죽이순간 훅하고 성당 조명이 꺼져버렸다. 갑작스레 덮친 어둠. 사람들은 술렁였다. 하지만 그때 가장 긴장했을 바이올린이 연주를 이어갔다. 다시 조명이 들어오고, 아랑곳하지 않는 연주자는 눈감은 채 마지막 활을 그었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런 거였구나. 성당이란 공간이 주는 웅숭깊은 음의 두께가. 연주는 소리일지 몰라도 산비달 성당의 비발디는 인생이었다.


그렇게 연주가 끝났다. 18세기 바로크 음악이 온몸을 휘저어 놓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클래식이 사계라더니  이유가 있었다. 사계는 자연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 슬픔, 두려움 같은 감정의 근원을 헤집어 놓았다. 어진 마음을 수습하느 한참을 허둥댔다. 앙코르도 없었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성당을 나서는데 클레아가 다가왔다. 그녀가 아는 척을 했다. "기차를 놓쳐도 걱정하지 말아요. 또 다른 일이 생긴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래 지방으로 갈수록 아프리카, 중동, 그리스가 섞인 묘한 느낌을 주는 피부색을 가졌다.


그녀의 말이 등을 후려쳤다. "기차를 놓쳐도 걱정하지 말라"는 한 마디. 그것은 가만 놔둬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서둘러 누르는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노란불이 아직 깜박이는 데도 횡단보도로 내려서는 강남역의 나에게, 또 막 출발하지하철을 기어코 타겠다고 계단을 뛰어내리 출근길의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닫히는 열차에 뛰어들면 옷자락은 늘 문틈에 지. 민망하게도.


마른침을 삼켰다. 아 이제부턴 기차를 놓쳐야겠다. 기차를 놓치면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걸 클레아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앞으론 기차를 놓치며 살아야겠다. 기차를 놓치면 벼락같은 감동과 소낙비 같은 영혼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데. 기차를 놓치면 새로운 사람들과 진짜 인생을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이제부터 기차를 놓치며 살 것이다. 나는 잣말을 해댔다. 기차를 놓치고 말겠다고.


영문 모르는 아내가 정스레 나를 다. 아내의 등뒤로 베네치아의 밤이 까맣게 가라앉고 있었다. 멀리서 메스트레 역을 떠나는 기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놓쳐버렸을 기차의.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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