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노르웨이로 간다. 피오르(fjord), 연어, 대구, 뭉크, 수잔 페테르센, 입센, 아문센, 바이킹의 나라. 가는 길이 이미 목적지가 되는 곳. 이름에 '길'이란 말이 들어간 나라. 노르웨이가 여기다.
이십년도 더 전, 1996년 여름. 나는 뉴캐슬(New Castle)에서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에 내렸다. 가는 곳은 노르웨이. 오래된 일제 닛산 자동차에 전기밥솥을 싣고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오슬로를 지나 베르겐까지 가면 그곳에서 뉴캐슬로 되돌아오는 페리가 있다고 들었다.
스웨덴 예테보리(Gotebörg) 못 미쳐 아내가 갑자기 탈이 났다. 옌셰핑(Jonköping)이라는 도시의 낯선 대학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고열이 잡혔다. 금발의 스웨덴 의사 말을 듣고 나는 나머지 일정을 포기했다. 덴마크 프레데릭순(Frederikssund) 마을로 내려와 일주일이 넘도록 쉬었다. 핼쑥해진 얼굴로 아내가 말했다. "여행이란 접어뒀다 다시 읽는 책처럼 나중에 또 오면 되지 않을까?"
남미를 탐험하던 영국 원정대가 원주민을 고용해 안데스를 올랐다. 새벽부터 서둘러 산을 오르던 원주민이 어디선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안달이 난 원정대는 그들을 재촉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를 내기도 하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원주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정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서 있었죠?" 원주민이 대답했다. "오늘은 일찍부터 쉬지 않고 걸었어요. 여긴 길이 험해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지요. 영혼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논문 일정에 맞추느라 빡빡한 여행을 꾸린 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에게도 영혼이 동행할 수 있도록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던 거 같다. 따지고 보면 반드시 새로운 곳만 여행할 수는 없을 터. 여행은 못다 한 채 남기고 오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언제 또 다시 올 수 있겠어?" 하면서 쫓기듯이 이곳저곳을 허둥대는 걸 보았다.
나는 여행을 책 읽기에 비유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구절은 밑줄을 그어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 보는 거. 빈 여백에 감흥을 끄적거리다가 선잠도 살포시 들어보는 그런 독서 같은 여행. 단 한 번에 끝내야 하는 다시 올 수 없는 여행은 얼마나 절박한가. 그렇게 단정 짓기엔 삶은 너무 많은 날인데. 여행은 평생에 걸쳐서 하는 거고, 기회는 만들면 다시 오는 게 아닐까.
이십년 동안 묵혀뒀던 아쉬움. 그때 접어둔 책갈피를 기억하고 노르웨이를 다시 찾는다. 아내와 다 큰 아들과 함께 튼튼한 SUV를 타고서. 달라진 건 밥솥 대신 한도를 늘린 신용카드뿐. 이번엔 또 무엇을 두고 올까. 벌써 다음 여행의 빌미를 만들 생각에 피식하고 혼자 웃는다.
물살이 바삐 갈라지는 소리를 보아 덴마크 히르샬에서 노르웨이 스타방에르로 가는 북해의 밤바다 어디쯤이었나 보다.
posted by 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