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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Mar 31. 2017

작은 가게, 문화 만들기(4)

Play: 문화콘텐츠 그리고 놀이

앞의 글에서 문화기획 과정과 몇가지 사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문화기획 가운데 만들어지는 문화콘텐츠는 결국 문화적 상품 혹은 제품 혹은 산물이다. 그래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근간이 되는 놀이에 대해 잠시 훑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문화콘텐츠는 문자 그대로 문화를 담은 콘텐츠이다. 자연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다양한 갈래로 정교화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하는 것은 주로 '예술'과 가까운 작은 의미의 문화를 일컫는다. 


콘텐츠는 콘텐트(content) 즉, 알맹이라는 뜻의 영어 콘텐트에 복수형을 의미하는 s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콘텐츠가 부족하다' 등으로 많이 회자되는 관용어에 포함된 것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체 미디어(media, 미디엄(medium)의 복수형)와 대응을 이루면서 복수의 미디어에 담기는 복수의 콘텐츠라는 함의가 있다. 물론 문화콘텐츠는 미디어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또 떼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책과 같은 올드 미디어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뉴미디어를 통해 시청각을 아우르고 촉각과 후각까지도 넘나드는 요즘의 미디어는 언제 어디서든 사람과 사람을 다양한 관계로 묶어낸다. 그 과정에서 수시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에 미디어가 마치 하나의 신체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이 다수의 미디어, N스크린을 넘나드는 콘텐츠 그중에서 문화콘텐츠는 문화와 예술을 담아내는 것이며 놀이를 떼어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놀이는 무엇일까?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놀이'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안타깝다. 그 삭막한 현실에 행복도 없고 또 새로운 세상이나 환상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놀이'가 있던 시절 우리는 스스럼없이 웃고 까불고 서로를 흉내 내고 놀리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한껏 놀고 나면 왠지 실컷 밥을 먹고 푹 잠을 잘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이며 축제하는 인간이며 축제를 통해 일상 속에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감성과 욕망을 풀어낼 수 있다


 놀이는 어린이들이 하는 것이고 일하지 않을 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일과 놀이는 분리되지 않았고 놀이를 통해서 인간의 공동생활을 단단히 묶어주기도 하고 상호작용, 나아가 사회 정치적 규칙을 익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하비 콕스는 <바보제>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며 축제하는 인간이며 축제를 통해 일상 속에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감성과 욕망을 풀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놀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비 일상성을 통해 충만함, 더불어 재미있고 사소한 재주를 뽐낼 수 있으며 작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어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해방감과 환상성에 매료되는 기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호이징하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문화는 놀이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모든 문화의 근원으로 놀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문화는 놀아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놀이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각성시킨 것이다. 놀이는 목적 없이 먹고 자는 이외의 신체와 정신의 활동을 일컫는 것이고 일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일과 놀이는 관점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행위가 일인지 놀이인지를 가르는 것은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조금 더 놀이다운 부분이 있거나 조금 일다운 부분이 있다는 시점과 주관의 문제가 크게 작용할 수 있다. 힘든 일도 누구에게는 놀이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로제 카이와가 <놀이하는 인간>에서 이야기하는 놀이는 그 규칙성과 속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경쟁(Agon)과 흉내내기(Mimicry), 운(Alea)과 현기증(Ilinx)으로 대표되는 속성에는 굳이 힘들게 떠올리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는 놀이들이 있다. 그 놀이의 예로 스포츠 경기나 연극, 도박이나 회전목마 같은 것들을 두서없이 떠올려 볼 수 있다. 이것들이 정교하게 규칙을 만들어 체계를 두고 있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변형을 거듭하는 가에 따라 같은 속성 내에서도 유아들의 대중없는 놀이부터 프로 스포츠 경기로의 층위를 나눠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속성 몇 가지가 어울려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지기도 한다.


놀이의 이러한 분류를 기준으로 삼아 어떤 학자는 이런 카이와의 놀이 연구를 문화의 연구 틀로 삼기도 하였다. 문화를 이루는 것들을 속성과 규칙성 정도에 따라 분류하고 그 속성의 묶음을 또다시 바라보게 된다면, 한 문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과 변화 정도 그리고 그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논리다. 


스티븐 존슨의 <원더랜드>에는 재미와 놀이가 세상을 창조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음악과 신비한 색깔,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향신료가 문화와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켰는가를 보여준다. 단지 좋아서,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인류가 향하던 곳에서 인류의 발전의 씨앗이 움튼 셈이다. 


놀이는 종교나 예술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것임을, 그래서 실제적 놀이를 하지 못하는 현대의 놀이 흉내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놀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입을 모으는 지점이다.


 놀이와 문화가 서로를 포함하는,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화를 담은 문화콘텐츠는 어때야 할까? 문화를 담고 기술과 인간다움을 묶어내는 가장 최근의 미디어 환경에서 향유되는 문화콘텐츠는 진짜 놀이가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과 놀이의 경계가 다시 모호해지고 놀이와 축제에서 찾는 환상성과 창조, 자아를 찾아 헤매는 유목성을 합쳐야 할 것이다. 문화콘텐츠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저 대신 놀아주거나 흉내를 내도록 하는 도구적 기능인 것이다.


 문화콘텐츠를 통해 즐거움, 기쁨을 느끼고 그 안에 재미가 있으며 그것을 만들거나 기꺼이 향유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놀 줄 아는 법부터 따져봐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그저 어릴 적 이유 없이 하루 종일 반복해도 지치지 않던 그 놀이를 어른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게 해도 좋겠다. 키덜트면 어떻고 피터팬 증후군이면 또 어떠한가. 그 안에서 감성적 욕망을 느끼고 인식을 넓혀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데 이것만 한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결국에는 이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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