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80년대 한국의 단색화와 민중미술
-다 보고 나서 러닝타임이 두시간 반 이라는 걸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한시간 본 줄. 이미 역사로 스포일러 당했지만, 몰입감이 장난 아니다. 황정민의 전두환연기.... 정말 너무 잘해서 때려죽이고 싶었다. 욕을 막 쓰다가 다시 지웠다. 제발 보세요!!!!!!!!!!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박정희가 죽은 10.26사태, 대한민국 1.박정희 전대통령, 2.차지철 경호실장, 3.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없는 권력의 공백 상태를 다룬다. 대통령이 죽은 상황이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이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게 된다.
-전두환이 주축인 ‘하나회’는 조직에 충성을 바치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를 경계하고 전두환을 지방 발령 내려던 정승화 총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작전명 <생일집 잔치>를 진행한다. 다만,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전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가 필요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의 지위를 이용해 정보를 꽉 잡는다.
-전두환은 자신의 편으로 회유가 되지 않는, 가장 거슬렸던 세 사람 : 장태환 수도경비 사령관★★(수도 서울 관할하여 언제든 출동 가능), 김진기 헌병감★ (헌병 : 군인들의 경찰 : 언제든 전두환 체포 가능), 정병주 특전사령관★★ (임무밖에 모르는 뼛속가지 군인)을 술집에 모아둔다. 이 셋의 발을 묶어놓고 정승화 체포와 대통령 결재를 동시에 처리하려 한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되는 초유의 사태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생을 마감한 군인들을 재조명하는 영화. 박정희부터 시작되는 군부독재로 인해 민주화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역사의 섬세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꼬꼬무 보고 가면 더 쉽게 몰입 가능하다.
[꼬꼬무2 1회 요약] "한강을 봉쇄하라!" 서울을 먼저 점령하는 자가 역사를 바꾼다? 운명의 레이스, 그날 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방송)
-이 글을 쓰는 2023년,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으며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영화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모든 혜택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졌던 분들의 덕을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물론 더 먼 훗날 2023년을 돌아본다면 부족할 수 있겠으나, 역사는 계속 발전하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성장하기를 원하니까. 이런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나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신을 지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1980년대,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으나, 경제적으로는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호황을 누렸다. 물론 전두환이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다행히 세계적 흐름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저유가, 저금리, 원화 약세로 수출이 호황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딱 하나 잘한건, 자신이 경제를 모른다고 인정하고 김재익 경제수석을 임명한 것. 하여간 수입품도 들어오면서 외국 브랜드 상품이 수퍼마켓에서 팔리고, 컬러TV에서 광고가 넘쳐났다.
-한편으로 정부와 민주화운동 세력의 끊임 없는 대립과 충돌이 일어났는데,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술계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가장 큰 이슈였다. 1970년대부터 계속 이어져 오던, 우리 미술이 늘 서구 미술과의 관계 속에 논의됐다는 비판이 있었다. 미술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하나로 결집한 것이 단색화 운동이었다.
-한국의 단색화는 19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미술계의 주류가 되었으며, 일본뿐 아니라 서구에도 소개되었다. 화면을 중성적인 색채인 흰색, 회색, 검정색, 갈색, 그리고 청색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모노크롬 또는 단색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이기 시작했다. 앵포르멜의 리더였던, 얼마 전 타계하신 고 박서보 작가도 그 중 하나였다. 1973년부터 ‘묘법’시리즈를 전개했으며, 80년대에는 선묘 대신에 젖은 한지를 굵은 연필심으로 긋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한지의 물성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가졌다.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는 박서보, 권영우, 정상화,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김기린 등이 있다. 또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환기 작가도 있다. 뉴욕 시기의 점화에서 김환기는,자신은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무심한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는 도공 처럼 점을 찍어갔다고 이야기 하며, 치밀한 사전 구상보다 자연스럽게 화면 전체의 조화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가들이고,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기도 한다.
-자주 비교되는 서양의 ‘미니멀 아트적 경향’이 논리적인 조형 사고인 반면, 우리나라의 단색화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1. 하나의 색을 강조하고,
2. 화면과 물감이 일체가 되는 평면성을 강조했다.
3. 자연 세계로의 회귀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자연적, 무기교, 무작위성이라는 한국 특유의 민족성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단색화는 동시대의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면서 전통과 정체성을 추구한 첫 번째 회화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한국적 색채와 극소의 표현으로 정신적 깊이, 자기 수양을 전달한다. 하지만, 민중미술가들로부터 ‘단색화는 형식주의로 현실을 도외시하고 삶과 유리된 미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민중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좁은 의미에서는 소외계층 즉 농민, 노동자, 빈민을, 넓은 의미로는 지배층이나 권력층에 대비되는 대중 모두를 의미한다. 1960-70년대에 민족 주체적 사고에서 시작된 민중문화 운동은 서구 문화의 추종에서 벗어나 고유한 민족문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시작은 문학이었다.
-민중미술의 역사는 흔히 두 단계로 이야기 된다.
1980-84년 : 소집단 중심으로 형성
1984-89년 : 전국적으로 확산
민중미술의 시초는 대체로 1979년 12월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 그룹으로, 현재 아르코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는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80년 10월 첫 전시를 한다. (전시 개막일에 미술회관 측에서 시국에 맞지 않는 전시라며 전기를 꺼버렸는데,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했다고 한다.)
-현실과 발언 그룹은 서구 미술의 모방이면서도 전통의 정신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단색화는 위선이며, 현실을 도외시하고 삶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기존의 유화 외에 포스터, 만화, 사진, 벽화, 판화, 사진 몽타주 등 대중문화의 여러 매체를 통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오윤, 손장섭, 김경인, 임옥상, 신경호, 민정기, 신학철, 강요배 작가 등이 활동을 했다. 단색화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며, 전투적인 벽화, 걸개그림, 손깃발, 플랜카드 등 대중 집회에서 사용하는 매체를 사용했다. 특히 걸개그림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대형 괘불탱의 전통을 빌렸는데, 정부 당국에 의해 벽화가 자꾸 지워져서 언제든지 접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걸개그림이 선호됐다고 한다.
-행동으로 나서는 민중미술은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투쟁성을 가진다. 단색화와 같은 모더니즘 계열 작가와 평론가들은 민중미술이 불온한 선동성을 가지고 있고, 예술성이 결여됐으며, 공산권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다를 것 없다고 비판했다. 이무렵 88년 뉴욕의 대안 공간인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민중미술, 한국 정치미술의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첫 해외 전시를 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민중미술은 조금씩 소멸되는 기운을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오면서 민중미술 계열이 아닌 작가들도 사실적 이미지나 대중문화를 포용하고, 삶의 경험과 이야기를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87년 박종철 고문사망사건, 6월 이한열 열사 사망으로 일어난 민주항쟁으로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선언을 하며 대통령 직선제로 88년 당선된다.
-세계적인 정세도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등 커다란 변화를 맞으면서 운동권 계열에 충격을 준다. 93년에는 30년만에 문민정부가 등장했으며, 민중미술은 운동으로서의 생명을 마감했다. 역사상 유례없이 저항적이고 비판적이었던 민중미술은 1980년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고, 민주화가 확산되며 소멸되었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1706210929190
-어릴적엔 민중미술의 직설적 표현이 너무나도 과격해서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표출하고 사람들의 인식에 불을 지피는 이런 운동이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예술의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땅히 그 시대의 ‘지성인’이라면 실천해야 할. 그런 점에서 현재는 너무나도 유명한 단색화 화가들보다 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다.
참고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김영나
-진짜 좋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