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로렌스 와이너
-학창 시절 독서실에 가방만 두고 뛰쳐나가 놀던 중 보았던 엄마의 “어디야”라는 문자는 나를 제 발 저리게 만들었다. (엄마는 가끔 문장부호를 생략한다) 엄만 언제 들어올 건지를 물었지만 나는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이 ’어디야‘란 말은 어느 상황에 누가 듣느냐에 따라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그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다.
-로렌스 와이너의 작품은 이런 언어의 특성을 재료로 만들어진다. ‘UNDER THE SUN’은 2010년 스페인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이고, 아모레퍼시픽이 소장하게 되면서 전시의 제목이 되었다.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보는 UNDER THE SUN과 한국의 가을 하늘 아래서 보는 느낌은 다를 테야. 작가는 본인 작품을 대하는 관람자에게 '수용자‘라는 개념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작품 구현에 대한 선택권과 책임을 넘긴다.
-일생에 한 번쯤은 그 유명한 변기통. 뒤샹의 ‘샘’의 모습을 본 적 있을 거다. 난데없는 서명된 변기통이 좌대 위에 올라와 있는 바로 그 것. 예술가가 선택해서 예술이 되었다는, 예술가의 아이디어 자체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예술가에게 엄청난 지위(?)를 불어 넣어준 바로 그 작품. 덕분에 캔버스에 유화로 평면 작업을 만들고, 돌, 나무, 청동 등으로 입체 작품을 만들던 예술가들은 점차 새롭고 다양한 방법을 찾아 나선다. 뭐든 예술이 될 수 있다며!
-그리고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미니멀리즘에선 급기야 작품 안에서 작가의 표현성 마저 없애버린다. 이로써 실체가 있는 예술 작품은 물리적인 것에서 정신적으로 변화한다. 정신적인 것으로 가다 보니 언어를 데리고 다닌다. 이게 바로 개념미술의 특성이다. 와이너의 작품 정보를 알려주는 캡션을 보면 재료에 ‘언어+언어가 가리키는 재질, 가변 크기’라고 되어 있다.
-와이너는 1969년 1월 '의도의 진술'이라는 선언문에서 물리적 실현의 가능성을 보유한 언어로 구성되는 것으로도 충분히 조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언어를 사용하여 작업한다.
1. 예술가는 작품을 고안할 수 있다
2. 작품은 제작될 수 있다.
3.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각 항은 예술가의 의도와 동등하고 일치하며 조건에 대한 결정은 수용 당시 수용자에게 달려 있다.
-예술가가 조각이라고 명명하면 텍스트가 갑자기 조각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니! 아무리 봐도 평평한 텍스트인데, 그 글을 읽고 물리적 실현의 가능성을 상상하면 그게 조각이 되는 거라니. 수용자들이 각기 맥락에 따라 해석해며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내면 된다는게 예술이라니..! 난 정말 대단한걸 하고 있군 쩝쩝 거리며 전시장을 나왔더랜다. 2023년 가을과 21년에 타계한 미국 작가의 작품과, ‘태양 아래’ 있는 백자와 조선의 공예품들이 한 공간 안에 있었다.
-언어도 시대와 문화와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세상에 고정돼 있는건 뭐가 있을까.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다. 다 알지 못할 수 밖에 없다. 부족해도 괜찮다. 내가 해석하는 대로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