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란 무엇인가?> : 레너드 코렌
“예술 작품이 예술 작품이 되려면 문법과 구문론을 초월해야 한다”
-바넷 뉴먼, 미술가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이유는 본인의 개념을 표출하기 위함 아닌가? 예술가가 외계어로 메시지를 보내는데, 번역기도 없이 어떻게 알아들으란 말인가? 적어도 보는 사람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경험을 끌어모아 어렴풋하게 추측하면서 되묻는다. 이게 맞나? 이런 작품들이 후덜덜한 가격대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 찝찝함은 극대화된다. 그들만의 어떤 리그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초대해 주라)
책 속의 여섯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보다 보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난다. 모두가 예술이라고 외치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이 작품들이 예술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뒤샹의 샘은 그냥 뒤집어 놓은 변기통이고, 존케이지의 4분 33초는 날로 먹는 행위 같고, 크리스토와 장클로드의 거대한 포장 작업은 공사 가림막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저드의 사물은 그저 책꽂이 같고, 온 가와라의 그림은 멈춰진 달력에다가, 세라의 기울어진 호는 객기로 느껴진다.
물론 작품 탄생의 과정과 개념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뒤샹은 유구한 미술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했고, 이러한 개념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존케이지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로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어찌 보면 동양철학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걸 쓰고 나서 찾아보니 실제로 일본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저드는 온갖 서사를 떠나 작품 앞에서의 현존을 추구했고, 온 가와라는 47년간 외부, 내부적으로 채집한 시간으로 관람객에게 의미를 물었으며, 크리스토와 장클로드는 언젠가 철거되는 거대한 포장을 통해 과정과 경험을 조명한다. 세라는 공공미술이 ‘공공성’을 가지지 않는 예로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예술의 DNA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백면화와 흑면화를 보고 ‘정결하다’고 느낀 그의 친구 존 케이지가 만든 곡이 4분 33초다. 새하얗다 못해 캔버스 그 자체 같은 백면화는 거대한 공백을 연상케 하는데. 캔버스는 결코 비어있지 않다고 말한 라우센버그의 말을 마음에 새긴 케이지는 침묵으로 공간을 채운다. 아니 사실은 악기 소리만 나지 않았지 다양한 소리로 채워졌다.
케이지는 이 뉴욕 공연을 이렇게 회상했다. “1악장이 진행되는 동안 건물 밖을 휘젓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2악장 때는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3악장이 흐르는 동안에는 관객들이 자신이 이야기를 하거나 공연장을 걸어 나가며 온갖 흥미로운 소리를 냈다.”
이 기가 막힌 공연은 현대 음악사뿐 아니라 플럭서스 운동과도 연계되며 백남준의 행위예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점차 형태를 바꾸며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새삼 재미있달까. 라우센버그의 그림을 보면서 ‘ㅇ ㅏ. 하얗 다 ‘라고 생각만 했는데 존 케이지는 '빛과 그림자와 입자들이 착륙하는 공항‘이라 평했다.
시각 예술 장르에서 어쩐지 시각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 같은 위의 작품들을 보면 누군가는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술가들은 본인의 일을 한다. ‘어떻게 하면 대중이 환호하도록 예쁘게 만들까?’를 생각하는 건 분명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논란을 만들고, 차분히 가라앉아 층이 생긴 곳을 휘저어 흙탕물을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이게 얼마예요?"라고 물을 때, 예술가들은 “이게 뭐죠?”라고 묻는다(자본주의를 재료로 이용하는 작가도 있지만). 단단히 굳은 관습을 도끼로 찍을지, 송곳으로 찌를지, 바늘로 긁은 건지 미리 계획하고 시작한 걸까. 얼마나 거대한 포부를 안고 창작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땔감으로 사용해도 오래 따뜻하지도 않을 것 같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이런 행위와 창작물은 실용적인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 혈안이 된 나에게 당혹감을 준다. 익숙하지 않고 불편한 상태와 과정을 나는 어떻게 느끼는지 집중할 수 있게 만들면서. 그 불편함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때때로 끼워 맞춰보고 감탄하기도 하다가, 다시 전혀 모르겠어서 좌절한다. 문득 드는 생각은 뾰족한 해결책을 내릴 수 없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이 모든 행위 자체가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문법과 구문론을 초월하는 예술가가 꼭 필요한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