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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Jun 30. 2021

<더 킹>이 실패한 지점

한재림은 한국의 마틴 스코세이지를 꿈꾸는가.

 세 시람이 차를 타고 가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 순간, 아주 파멸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우리의 주인공은 내레이션을 시작하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좋은 친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재림 감독의 <더 킹>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더 킹>은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아쉬운 사람이다. 이 영화가 <좋은 친구들>과 동일한 구조로 시작할 때, 그리고 한국사의 단면을 다큐멘터리로 삽입하며 대담해질 때, 또한 진중한 영화의 분위기를 굿판 앞에서 뒤집어 버리는 센스를 지켜볼 때, 나는 '한국에서도 드디어?' 하는 기대감에 사로잡혔었다. 그랬기에 나는 정우성의 오그라드는, 그리고 너무 단순한 역사 강의(를 빙자한 감독의 풍자)까지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통렬판 아쉬움으로 전환된 순간은 류준열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 순간 <더 킹>은 '그저 그런' 한국 영화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진다. 이것은 단지 류준열이 한국 영화에서 자주 소비된 '의리 있는 깡패'로 소비되기 때문은 아니다.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류준열이라는 캐릭터가 영화로 진입하는 순간, 영화는 관객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만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검찰과 권력의 유착을 풍자하는 코미디이면서, 한 남자의 상승과 하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엔터테인먼트다. 이런 기법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주로 사용했던 방법으로, 영화의 중반부까지 한재림 감독은 이 구조를 한국이라는 사회에 적절히 대입하며 극을 매끄럽게 이어간다.


 여기까지 영화를 보며, 관객은 분명히 부정의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동경하는 애매한 상태로 극장에 남겨진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작품이 여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인물들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바꾼다. 그리고 그 시련은 대부분 주인공들의 넘치는 쾌락을 제압할 수 있는 더 큰 강자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새로운 적에 맞서는 과정에 그들이 잃어버린 것,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것들을 깨닫고, 결국 분열한다. 그 분열이 불러오는 파멸의 결말과 파멸을 통한 인생의 회한을 담는 것. 그것이 마틴 스코세이지가 영화를 통하 담아내고자 한 인간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재림 감독은 이 지점에서 애매하게 류준열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류준열을 위한  플래시 백은 없다. 즉, 류준열은 관객에게 설득되고, 이입되는 인물이 아니다. 영화는 류준열이라는 캐릭터에 관객들이 이입할 장치를 배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우성과 조인성에게 그것을 모두 투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이 난 후, 나의 친구들 대부분은 류준열에게 감정을 이입("의리 있다!", "멋지다!")하고 있었다.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투 트랙이다. 한쪽에서는 권력자들의 육체적 쾌락을 전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의 이념적 투쟁을 전시한다. 하지만 류준열이 개입함으로써, <더 킹>의 주인공은 검사와 정치인이 아니라 깡패가 되고 말았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체육교사를 응징하는 장면이다. 작품에서 조인성은 여고생을 성추행, 폭행한 체육교사를 놓아주는 대가로 '정우성 클럽'에 초대된다. 나는 이러한 설정을 삽입하려면, 조인성이 여고생을 과감히, 잔인하게 버리는 선택을 하고, 또 그것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객을 '악한 주인공들을 동경하는' 불편한 상황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조인성이 체육교사를 풀어준 후, 류준열의 '의리'로 인해 응징이 이루어진다. 류준열이 체육교사를 패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관객은 이 장면을 통해 조인성이 겪을 정신적 고뇌를 육체적 폭력의 쾌락으로 보상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은 부담 없이 조인성의 부정의 관람할 수 있고, 이 순간 영화가 가진 정치적 대담성은 사라진다. 검사들의 암투라는 외피를 쓴 깡패들의 패싸움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깡패의 영화가 되어버리는 지점은 여기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검사들이 시련을 해결하는 방식은 모두 깡패들이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감독은 "검찰이 깡패들과 유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객들은 "깡패가 대한민국을 움직인다. 존나 멋지게 인생을 즐기면서"가 된다.


 하지만 <더 킹>이 그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변명하고 싶기도 하다. 만약 한재림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했던 검찰이라는 조직을 한 남자의 상승과 하강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아직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깡패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애초에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무언가의 외피를 둘러쓴 깡패라면. 이렇게 관점을 바꾸어 보면, 정치적,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노무현의 죽음 연출'도 납득이 가능하다.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서사에서 충격과 쾌락만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서 쾌락은 "얘네가 대통령도 죽인다고!"의 쾌감이다. 분명 불쾌한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악인들의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쾌감의 장면이기도 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영화의 엔딩이다. 영화는 분명히 보여준다. 조인성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는 대의가 아닌 생존과 복수를 위해 정치인이 된 것이라고. 이 순간 정우성과 조인성의 대립은 마틴 스콜세이지식 엔딩에서 완전히 탈주한다. 회환과 반추 따위는 없다. 깡패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한재림 감독의 변주가 성공적인지, 아니면 결국 용의 머리로 시작하여 뱀의 꼬리로 끝나고만 또 다른 '깡패 영화'인지. 결정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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