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계형 개발자 Sep 01. 2018

인문학이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까?

인문학과 소프트웨어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계의 대세 키워드는 '융합'이었습니다. 서로 별개인 학문이 만나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한 융합은 당시 정권의 핵심 정책(창조경제)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 개념이었는데요. 정권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사회 유명 인사들은 정부의 정책기조에 발맞춰 언론에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서점에서는 융합과 관련된 도서들이 출간되면서 학교에서도 이런 사회분위기를 따라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창 핫하던 컴퓨터 공학도 무관하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가 심리학을 이중 전공한 이력 덕분에 융합의 성공적인 사례로 더더욱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컴퓨터 전공자와 대학교 그리고 기업에서 소프트웨어에 인문학을 입히려는 시도가 이뤄졌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평소에는 가까이하지 않는 인문학 교양 도서를 구입해서 읽어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는 공대생들에게 졸업 필수 학점으로 인문학 강의를 추가하고 이공계와 인문계 교수가 함께 진행하는 강의를 개설하며 학생들의 관심을 유도했습니다. 특히나 생존에 민감한 기업은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직원들의 더더욱 인문학 교육에 공을 들였는데요. 단순히 사내 강좌를 늘리고 인문 도서 구입 지원비를 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문학 DNA를 심고자 실제로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로 채용하는 기업도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서랍장에 인문학 책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당시 사회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인문학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평소에는 제 눈밖에 있던 어려운 교양 책도 읽어보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에도 참석해보고 더 심도 있게 공부해보고자 학점 양민 학살을 무릅쓰고 문과대학 수업을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들였던 노력이 지금은 관심으로 이어져 지금도 인문학 도서를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어보게 되고 쌓인 지식 덕분에 가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폼도 잡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머릿속에 쌓아둔 지식들이 과연 개발하는데 도움이 됐을까요?


지금까지 일하면서 인문학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는 프로젝트의 이름에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자 역사시대의 인물이나 유적지 또는 산 이름을 붙이는데요. 저희 팀도 새롭게 시작되는 과제를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반드시 인문학과 관련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떤 팀의 과제는 팀장이 원더우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원더우먼'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 팀은 담당 임원이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단어를 선호한다는 말을 듣고 모든 팀원들이 회의실에 삼삼오오 모여 옛날에 읽었던 그리스 신화 만화책을 회상하며 오랜 시간 단어를 물색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했습니다. 개발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지요. 그리고 과연 필요한 일이 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장시간의 회의 끝에 선정된 과제의 이름은 '케르베로스'였습니다

그러면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요? 다른 개발자들은 인문학적 교양으로 덕을 보고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선 제가 평소에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동료 개발자들이 어느 정도 답을 줄 것 같습니다만 이 분들 중에서는 인문 교양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개발 도서를 제외하면 책도 1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하셨고 알쓸신잡같은 교양 프로그램도 거의 보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아직까지 많은 개발자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것 일수도 있고 다른 회사나 더 직급이 높은 개발자와 일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만 놓고 보면 개발과 인문학은 전혀 무관해 보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종류의 고민을 교양을 중시하고 전파하려는 학자들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 인용문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의 가토 슈이치가 이 남긴 말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비평가도 교양의 실용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절반 정도밖에 확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내가 런던에 있을 때 작은 투자회사 사장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서 놀란 것은 그 사장의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이 대부분 그리스어와 라틴어, 스페인어 원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어느 정도 그 원전들을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리스어로 된 기원전의 고전들이 투자회사 사장의 비즈니스에 과연 얼마만큼이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그다지 사업에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근대적 경제학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하거나 고전에 해박하는 등 그런 폭넓은 교양이 몸에 배어 여러 전문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양의 역할에 대한 이 책의 전반적인 관점은 테크놀로지가 이룩한 기술 문명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나침반으로 보고 있을 뿐 교양과 기술발전의 연관관계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은 없습니다. 물론 이 책도 수많은 견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어쩌면 저는 인문학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회사에서 일을 해보니 개발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는 인문학과 연결할 고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과연 시스템에 새롭게 추가한 프로세스가 야기할 수 있는 오버헤드를 예측하는데 프로세스의 입장에서 시스템을 바라봐야 할 정도로의 감정이입이 필요할까요? 아무리 피카소와 다빈치의 작품을 감상하고 담긴 의미를 분석한다고 한들 거기서 새로운 디자인 패턴을 창안할 수 있을까요? 로렌츠 곡선을 본떠서 만든 스케줄러는 우리가 기대한 만큼 하드웨어 자원을 시스템 프로세스에 효과적으로 분배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가장 가까운 영역으로 개발 문화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것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정도인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원칙이 필요한 정도였지 조조 같은 명장의 지략에서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아 체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개발에서 인문학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단언컨대 No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문학과 코딩은 정말 관련이 있을까요?

정작 개발에 필요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몰입'이었습니다. 변경이 쉽고 성능이 훌륭하며 보안이 튼튼한, 모든 요구사항을 맞춘 소프트웨어의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선 단순히 설계 도서를 읽고 구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해당 주제를 다룬 수많은 논문과 개발 블로그를 꼼꼼히 읽어본 후 서너 가지의 후보 구조를 도출 및 구현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것 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을 때는 관련된 콘퍼런스에 참석해 다른 개발자의 발표를 들어보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최선의 구조를 찾아보겠다는 열정이 필요했었지요. 30번 실행해서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버그를 해결해야 할 때는 에러가 재현될 때까지 두 시간 넘게 책상에 앉아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붉은 로그 메시지를 관찰하며 '건초더미에서도 바늘을 찾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문제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 없이 오로지 프로그래밍에만 집중할 때 좋은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가 우수하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모니터 앞에 앉아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개발에 몰입했던 사람들입니다.


본래의 기대와 달리 인문학은 제게 개발 이외의 영역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얻게 된 인문학적 지식은 컴파일 에러는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뉴스와 신문에서 다루는 사회이슈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 소프트웨어를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데 한정 짓지 않고 사회, 경제와 연관 지어 이것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접하는 독서모임을 통해 얻게 된 공감 능력은 소프트웨어 버그를 고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동료와 일할 때는 요긴했습니다. 고용 계약 관계인 점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협력하는 게 아무래도 일할 맛이 나니까요. 이것들은 모두 개발과는 관련 없지만 개발자로서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양분이 됐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영향들은 인문학 없이 모니터 화면만 본다면 얻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소프트웨어와 인문학의 시너지는 '몰입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같이 일할 수 없는 능력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