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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 개발자 Sep 14. 2018

같이 일할 수 없는 능력자

협업할 줄 모르는 능력자는 없는 게 낫다

작년 겨울, 미국 여행을 마치고 복귀하기 전날 밤. 나는 하염없이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긴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싫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같이 일할 수 없는 능력자 한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된 곳으로 다시 출근해야 하는 것이 내겐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아 나는 왜 미국을 관광만 하고 온 걸까. 어디 이력서라도 넣어 보고 올걸. 그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출근할 수 있을 텐데


같이 일할 수 없는 능력자


지금부터 같이 일할 수 없는 능력자를 A라고 부르자. A는 내가 지금 팀에 합류하기 10년 전부터 이 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부서 이동이 잦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A는 우리 팀에서 다루는 분야를 일관성 있게 프로젝트를 경험해볼 수 있었고 또한 그의 상사인 프로젝트 리더도(이제 PL이라고 부르자) 팀에서 기술을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참이라 A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A 또한 개발에 관심이 많았고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자 A는 이 분야에서만큼은 우리 회사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도 최고 전문가로 뽑히는 인물이 됐다. A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 모두 A가 기술에서만큼은 독보적인 능력자로 인정했다.

모욕감은 인간이 감당하기 가장 힘든 감정인 것 같다.

하지만 A의 전문성과 대인관계 능력은 비례하지 못했다. 사실 A는 누가 봐도 같이 일하기 싫은 동료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본인의 입으로는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막상 말과 행동은 그렇지 못했는데 A는 본인의 전문성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근거로 팀의 동료들을 군림했다. 회의 시간에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감히 네가 뭔데 나를 이기려고 드느냐'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해버렸고 A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품으면 사실 관계 확인에 앞서 면전에서 고성을 질렀다. 잘못된 정보를 말할 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쏘아붙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우리 팀끼리 있을 때만 했으면 좀 나았을 것을 외부 팀 사람이 회의에 참석하는 날에는 더해 생면부지인 사람 앞에서 자기 부하에게 모욕감을 선사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것을 본인의 능력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결과 회의 시간에는 A와 PL을 제외하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코드에 문제가 있어도, 창의적인 의견이 떠올라도 괜한 말을 꺼냈다가 욕먹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두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과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져 누구 하나 믿고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주는 것이 일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A와 면담했을 때 내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내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데 XX 씨가 성장했으면 해서 일을 주는 거예요. 사실 내가 하면 금방 다해요" 이 말을 듣고 어느 누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는가. A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부서원들을 이런 식으로 대했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와 달리 다른 분야에서 일 좀 해본 분들은 A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했다. 더 이상 A에게 자존감을 박탈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팀을 떠나야 했다. 내가 이 팀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들이 떠나갔고 들어온 후에도 사람들이 떠나갔다. 떠난 사람 중에는 내가 진심으로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선배도 있었다.

모두가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인사팀에서는 조치를 내렸는데 그건 바로 '이 팀에서는 더 이상 부서 이동이 불가함'이었다. 아니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왜 감옥을 만들어 버리는 걸까. 오히려 A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것을 자신에 대한 항복 선언으로 착각했는지 이전보다 더 세게 나왔다. 그러자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PL을 찾아가 'A와 도저히 일을 못하겠으니 특단의 조치를 해달라'라고 했다. 특단의 조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챘을 것이다.


과연 우리끼리 잘할 수 있을까?


이 말을 들은 PL은 처음에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힘들어도 같이 협업해볼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점점 아무 말이 없어져갔다. 사실 PL의 입장에서 A를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은 매우 리스크가 큰 결정이다. A가 없어지면 프로젝트는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과연 A 없이 프로젝트가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을까? 만약 기술적인 난관이 생기면 A 말고 누가 해결할 수 있지? 솔직하게 말해서 이건 나도 걱정이었다. 과연 A 없이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옆에서 건너 배운 것 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이러다가 퇴근도 못하게 되는 거 아니야?

우리끼리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휴가를 떠나던 시점은 이 모든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A는 여전했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사람들은 전방위로 PL을 압박했으며 PL은 우리에게 '조금만 참아라'는 헛된 희망만 주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우리 팀은 한 달째 원인을 알 수 없는 버그를 고치느라 씨름하고 있었고 늦어도 이번 달 안에는 해결해야 한다는 재촉을 받은 상태라 모두가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 갈등은 내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해결되기 시작했다. A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 간의 갈등 문제는 해결됐다. 이젠 더 이상 자존심을 긁는 사람도 없고 분위기 흐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마냥 기뻐하기엔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과연 A 없이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한 달간 우리를 괴롭히던 버그는 A가 떠나고 일주일 만에 해결됐다. 그것도 전혀 A의 도움 없이 말이다. A 떠난 후 첫 회의시간에 사람들은 예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류가 생긴 원인으로 의심 가던 부분이었는데 확실하지 않아서 섣불리 말했다간 A에게 무슨 질타를 받게 될지 몰라 숨겨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한 부분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활발히 의견을 나누어 가며 디버깅하다 보니 원인으로 생각한 부분은 하나의 함수로 좁혀지게 됐고 결국엔 코드를 수정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A가 해결하지 못한 것을 협업할 줄 아는 평범한 개발자들이 해결한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과 함께 하니 과제 초기엔 어려울 것 같아 보였던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모르는 것이나 새로운 생각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회의 시간에 서로 의견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됐고 이 과정에서 서로가 몰랐던 부분을 채우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만약 A가 있었더라면 아무런 말 없이 A의 일방적인 지시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회의가 끝나고 나면 그저 '시킨 대로'하고 있었겠지. 그러면 몰랐던 것은 계속 모르고 있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각자의 머릿속에서만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 A가 문제와 관련된 분야에 정통해지기 전까지 전체 구성원들은 '대기'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개인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조직의 미래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의 소프트웨어는 한 사람의 지식으로만 커버하기엔 너무도 비대해졌다. 아무리 똑똑하고 기억력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소프트웨어의 모든 컴포넌트들 간의 동작 원리와 관련된 도메인 지식을 머릿속에 담아두기에는 쉽지 않으며 더 나아가 오류를 찾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게 됐다. 이제는 천재 같아 보이던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개발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하더라도 너무도 많은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A와 일해본 경험을 통해 더 절실히 느끼게 됐다. 아무리 A가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분야를 커버할 수는 없었다. 혼자 일하는 천재 한 명보다는 평범하더라도 협업할 줄 아는 개발자 그룹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더 빠르게 만든다. 만약 분위기를 흩트리는 능력자가 있다면 과감히 내치자. 남은 사람들끼리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생각보다 괜찮게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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