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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 개발자 Aug 19. 2019

사랑했던 첫 직장을 떠나며

이 좋은 곳을 퇴사하게 되다니

퇴사를 경험한 친구에게 회사를 그만두는 건 오래 사귄 연인과 이별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까 연애와 회사는 관계의 끝에선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연인과 헤어지려고 결심하기 전에 한 번쯤 떠오르는 고민들, 예를 들면 '함께 한 청춘이 아쉽다'거나 '이 사람처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뭐 이런 졸렬한(?) 생각은 '이곳에서 그래도 잘해왔는데'라는 아쉬움과 '다시 이만한 회사를 다시 다닐 수 있을까'하는 걱정과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꽤 유사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헤어지기 전 상대방과 좋았던 기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처럼 퇴사하기 전에는 이곳의 장점과 이뤄온 성과가 마음 한 편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도 회사라는 추상적인 대상과의 관계를 중단하는 일이니까 헤어짐에 비해선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 좀 쉬울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니었다. 눈물 날 정도로 슬픈 것은 아니었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 '저 회사 그만둡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부인할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쉬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인마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회사도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존재했다.

연인과 회사와의 관계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의 전 직장은 첫 직장으로선 꽤 좋은 곳이었던 것 같다. 다른 회사의 신입사원보다 꽤 높은 경제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각종 의료 혜택, 맛있는 식당, 삼끼 무료 제공, 사내 피트니스 센터, 통근버스, 금융복지 등등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복지 모두 갖춰진 곳이었다.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회초년생이 안정적으로 돈을 모으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가진 능력에 비해 과분한 수입을 받은 덕분에 난 다른 동기들에 비해 꽤 일찍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고 학생일 때는 가지 못했던 해외여행도 1년에 두세 번은 다녀 볼 수 있었다. 회사 차원의 복지뿐만 아니라 회사가 주는 타이틀도 꽤 가치가 있었는데 이곳은 부모님이 어디 가서 '우리 아들/딸 여기 다녀요'라고 자랑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경조사 때마다 등장했던 회사 이름이 담긴 화환은 가족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나도 나 스스로는 한참 보잘것없지만 해외여행 중 외국인에게 '저는 OO 다녀요'라고 말하면 '오 리얼리? 그뤠잇!'이라고 감탄사를 받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로 이곳은 돈으로나 복지혜택으로나 네임밸류로나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개발자로서 일하는 것도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보안 절차가 빡빡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개발자들의 불편한 사항들을 듣고 절차를 완화하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회사 경영진들은 그동안 취약하다고 평가받은 소프트웨어를 육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교육과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중이었다. 오랜 기간 제조 회사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관료주의, 선후배 관계 등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비판하는 수직 구조의 문화가 남아 있었는데 내 경우에는 오히려 이것이 좋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해온 범생이 컴퓨터 공학도였던 나는 간단한 IDE도 다루기 힘들어했을 뿐만 아니라 개발자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툴과 배경 지식이 생소했는데 이럴 때마다 선배들의 따뜻한 관심(?)과 집중 케어 덕분에 최소한 1인분은 하는 생계형 개발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수평적이나 개인적이고 각자도생의 성향이 강한 곳에선 내가 이만큼 빠르게 클 수 있었을까 싶다. 다방면으로 평범했던 내가 성장 하기엔 최고의 회사였다.


이렇게 좋은 점들만 열거해놓으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왜 회사를 떠나려고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회사를 반드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까? 회사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회사 밖의 지인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할 때 대부분의 반응이 이랬다. 그러나 내겐 회사를 다니며 얻었던 다양한 기회와 경제적 보상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 있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퇴사를 결심하기 전까지 품어왔던 의문점을 주변인들에게 드러 낼 때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것이다', '여기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 '나간 사람들 모두 다 후회했다'라고 회유와 걱정(?)을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해소되지 못한 의문사항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컴파일 에러처럼 모두 하나 같이 이곳의 문제점으로 나타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팽창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없이 바쁠수록, 문제를 해결하려기 보단 외면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 연봉과 연차가 높아질수록 결점은 비탈길에서 내려오고 있는 감당 할 수 없는 커다란 눈덩이가 되고 있었다. 나를 짓누를지도 모를 눈덩이는 어쩌면 이곳에서의 또 다른 기회를 통해 운 좋게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기회는 언제 올지, 과연 오기나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언젠간 눈덩이에 깔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던 것은 확실했다.

연봉과 연차가 높아질수록 결점은 감당할 수 없는 눈덩이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커다란 눈덩이를 멈춰보려고 한다. 앞으로의 글에선 내가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연재할 예정이다. 혼자 일기에나 써두면 될 것을 긴 시간을 들여 쓸데없이 거창하게 브런치에 올리는 이유는 어떤 축구선수처럼 디시전 쇼를 열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으려는 관심종자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직장을 떠나려는 현재의 내 모습에 스냅샷을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퇴사 이후로 한동안 여러 가지 일로 꽤 고생하게 될 것 같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어쩌면 현재의 선택을 꽤나 후회하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의 확신에 찬 모습을 잊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려운 순간마다 지금 내가 작성한 글을 통해 다시 마음을 다시 잡고 싶다. 소액 주식투자도 손실이 무서워서 못하는 핵 쫄보인 내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선택을 했으니 적어도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문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를 위한 길고 장황한 부적이라고 생각하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흔들릴 때마다 다시 펼쳐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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