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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 May 22. 2022

창업 실패 후 학습한 것들-1

커버에 굉장히 귀여운 이미지가 있으니 잠시 기다리시길

길어질 것 같은 글은 제목을 숫자로 나누는 것이 좋다.

상 / 중 / 하로 나누게 되면 '창업 실패 후 학습한 것들 - 하하하' 가 생기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길어질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작 배운 점 5개를 쓰는 데 메모장이 벌써 한참이나 내려간다.


나는 창업자 출신의 프로덕트 매니저로, 2016년부터 대략 5년 간 스타트업을 운영했다.

빛을 보기까지 4년이 걸렸으나, 별 볼일 없어지기까지는 1년이면 충분했다. 실패를 인정하는 데도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딱 3년만 일해보고 다시 생각하자, 그리고 제발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모 스타트업에 7년 차 신입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면접관들(현 나의 상사이자 경영진들)에게 이 이상한 짓은 진압당하고, 감사하게도 스톡옵션을 포함한 굉장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어느새 1년 반 동안 회사를 다니고 있다.

결과적으로 3년만 하자 / 신입으로 시작하자라는 두 가지 이상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곳은 기회만 있으면 내가 더 많이 배울 수 있게끔 배려하고, 더 많은 권한을 주려 노력하며, 더 좋은 대우를 해주기 위해 애쓴다. 마음 다잡고 배운 지 약 1년 반, 그동안 배운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도 남들처럼 아주 멋들어지게 전략과 자본, 스타트업과 경영 등의 소제목을 붙이고 싶었으나 딱히 구분 지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어떤 소제목이 어울리는 지도 잘 모르겠다. 이것도 불상사를 막기 위해 소주제에 숫자를 붙여 구분해야겠다.



1. 1분기는 짧지만 길다.

2018년. 나는 이름 들으면 알만한, N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액셀러레이터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들은 나름의 원칙이 있었는데, 시드 라운드를 재투자하는 경우는 없었고, 푸드 테크는 피하고 싶어 했다. 당시 나는 꽤 괜찮은 사업 아이템(푸드 테크)과 돌아버린 실행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괴상한 모습에 경탄했는지 이들은 딱히 지표도 없었던 내게 자신의 원칙을 어겨가며 두 번이나 투자를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실패했다. 가시적 성과 없는 가능성만 있는 팀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기란 쉽지 않다.


당시에는 그들이 내게 줬던 9개월기회가 굉장히 짧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나는 겨우 3명의 팀원을 데리고 서비스 기획부터 개발(모바일 앱과 윈도우 앱)까지 모두 해야 했고, 역삼동 전역을 누비며 수백 개 식당에 영업을 해야 했으며, 다시 수십 개 POS에 우리 솔루션을 설치해야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가내 수공업식의, 확장 불가능한 굉장히 멍청한 짓이었다. (그 와중에 IR, 정부 과제, 특허 등록, 마케팅, 경영 관리 업무도 직접 했다.)


1분기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이다. 고작 반년만에 몇 천억의 벨류에이션을 만들어낸 미국의 전설적인 벤처 기업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웬만큼 어려운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수준의 서비스는 한 두 달이면 최소한의 기능을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달로 테스트해보면 이게 될성부른 나무인지, 썩은 떡잎인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몸담은 회사도 1개 분기에 어떻게든 문샷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한다.

나는 스스로 의지가 꽤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이 회사의 집념은 놀라울 때가 있다. (모든 시도가 성공하지는 않지만.)

당시의 나는 꽤 어렸고, 성과 창출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1분기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시간인지를 알지 못했다.


(또 하나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보통 벤처 펀드 존속 기간은 8년 정도인데 이 중 4년을 투자하고, 4년은 회수한다. 사실상 투자 가능 기간은 4년인 셈. 따라서 그들에게 1분기는 꽤 긴 시간이다. 그들은 이런 제약 조건을 감수하고 나를 반년 이상 기다렸다.)



2. 현금은 목적이 아니라 자원이다.

2015년 경, 나는 자존심 때문에 어떻게든 손 벌리지 않고 창업하려 악착같이 일했었다.
100원 단위도 아꼈고, 배 꺼질까 봐 칼로리를 확인해가며 도시락을 샀었을 정도니까. 결과적으로 손은 벌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동안 현금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버릇이 생겼었다.


사업을 실패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보통은 자원 배분의 실패가 주 요인이다.

스타트업에게는 시간과 현금이 가장 중요한 자원인데, 시간과 현금이 무한하다면 무한한 횟수의 비즈니스 실험을 수행할 수 있고, 자연히 성공에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수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두 개를 동시에 허비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스스로 낭만적이라고 느꼈었던, 하루 20km를 걷고 탈수에 시달리며 세일즈를 했다는 것은 내가 자원 배분을 제대로 못했다는 증거지 열정적인 창업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단, 필요할 때도 물론 있다. 그것이 플랫폼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2년 전까지만 해도 서비스 구축에 원가가 너무 많이 들었다, 플랫폼 비즈니스가 동작하게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라는 변명을 나름대로 합리적 해석이랍시고 떠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자기변명이었다.



3. 자본은 실험 가능 횟수와 거의 같다.

린스타트업은 작고 빠르게 구축하고, 실험하며, 증명하고, 개선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경영론이다.

쉽게 말해 니가 생각한 것은 일단 틀릴 거고, 시장에서 실험해보지 않으면 성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더 많은 자본이 투입되기 전에 작게 구축하고, 빠르게 입증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자원을 아끼면? 여러 번 더 실험할 수 있다.
(급여 지급 가능 횟수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나처럼 망한다.)


현금은 목적이 아니라 자원이기 때문에 현금 보유량은 사실상 실험 가능 횟수와 같다.
처음 창업을 하면 하루하루 돈이 빨려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을 아끼기 위해서 몸부림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창업의 목적이 현금 창출이 아니라 현금 보호로 역전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현금을 보호하기 위한 경영을 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실험할 수 있는 바’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시의 나도 현금을 자원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하루 burn-rate와 runway를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고, 더 다양하게 실험하지 못했다.

과감하게 투자하고, 실험했으면 얻는 바가 있어야 했다. 아까운 자원으로 실험했으니까.



4. 거래를 할 거면 거래를 하자.

스타트업의 첫 제품은 보통 누더기 같은 꼴을 하고 있다. 하드웨어라면 못생겼을 것이고, 생김새에 비해 굉장히 비쌀 것이며, 소프트웨어라면 세 번 정도 리프레시 후 뻗을 것이다. 결제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여 욕이란 욕은 다 먹을 가능성도 크다.
이때 창업자들은 겁을 집어먹기 시작하는 데, 보통 이들이 흔하게 봐온 제품들은 이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나보다 수백 배의 돈을 들이고,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제품일 것이니까. 이것도 결국 실험 횟수의 문제로 귀결된다.)

겁먹은 창업자들은 물건을 공짜로 푸는 요상한 짓을 벌이기 시작한다. 특히 플랫폼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면 플랫폼을 확산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정당화하며 그런 짓을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이때는 누가 내 제품을 쓰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기니까.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진짜 문제는 풀고자 하는 시장 문제가 실존하고, 솔루션이 제대로 동작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이 거지 같은 물건을 실제로 팔아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게 시장에서 동작한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누군가 이걸 돈 주고 사는 것이다. 그 외에는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것을 파는 것은 검증의 수단이지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거래의 일부이며, 구매자는 좋은 머리를 써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솔루션을, 나름대로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그들은 당연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창업자는 검증의 기회를 잃어버린 채 마치 제품이 잘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경험상 공짜로 서비스를 획득한 사용자는 리텐션도 낮고,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구매자에게 물건을 직접 팔기 시작하면 이게 시장에서 working 하는 제품인지, 가격은 적정한지(가격 전략은 적정한지), 타겟은 누구인지, 누가 진성 고객인지 등 비즈니스에의 핵심 질문에 거의 대답할 수 있다.



5. 교섭력이 강한 / 만나기 어려운 구매자는 극복하려고 하지 말자.

세일즈를 하다 보면 유독 교섭력이 강하거나, 유독 (물리적으로) 만나기 어려운 리드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영업명장’ 따위의 책을 보면 이런 구매자를 반년 정도 찾아가서 설득하다가 구매자가 겪는 어려움을 극적으로 해결해주어 일이 술술 풀렸다는 식의 내용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고된 영업에 시달리고 있는 창업자들은 이런 책들을 보다가 홀려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경우들이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Star에 해당하는 리드를 정확히 공략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지 쓸데없이 빡빡한 리드를 설득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운이 좋게도, 시장 내 영향력이 강한 리드(그리고 왠지 더럽게 빡빡하게 구는)를 만나 일이 풀렸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리드가 어떤 노드와 연결이 잘 되어 있는 지를 확인하고 공략하는 것이지 단순히 나를 힘들게 굴었던 리드를 전환시키는 게 아니다.


보통 일주일 내내 없는 거래처 사장 / 유독 교섭력이 강한  리드는 확보를 해놔도 전환이 어렵고, 거기서 발생하는 지연은 모두 영업 비용으로 돌아온다. (또 자원을 잃었다.) 플랫폼 강화에도 딱히 도움이 안 된다. 배달의 민족이 열정이 딸려서 TTS를 도입한 게 아니다.





대략 15개의 소주제가 남았는데, 글은 벌써 브런치 포스트의 평균 길이를 넘어간 듯하다.

내가 조금 덜 게을렀더라면 20개의 소주제를 켜켜이 정리하여 훌륭한 내러티브와 멋들어진 소제목을 붙여가며 글을 쓰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카카오 지하 창고 가장 구석에 위치한 마트료시카 안에 있는 가장 작은 인형 안에 먼지만 쌓인 채 묻힐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글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더 보고 싶다고 말해준다면 그때부터 더 살을 붙여 창업 실패 후 학습한 것들 - 시리즈를 완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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