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상을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다루느냐, 아니면 다른 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 대상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해서, 돈이 많아서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이는 그 사람을 이익의 도구로 다루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 사람 자체(성격, 행동, 가치관 등)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것 또한 그렇다. 반면에 그 사람이 그 자체로 존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목적으로서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으며 이 두 가지 사고가 중첩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는 수단과 목적 중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목적 대 수단'의 긴장은 '공부'라는 영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20대 초반까지는 살면서 공부 자체를 목적으로 다뤄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로 인해 시험점수 자체가 중요했고, 시험범위 외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
역설적으로 시험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난 군대에서 지식을 탐구하는 행위가 즐거운지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상하게도 시험이 없어진 상황에서 보이지 않던게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지식은 사람들이 구성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 덕분에 나 또한 새로운 지식과 나만의 지식을 구축해 나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입시공부에 의해 암살됐던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순수함을 되찾고 난 후, 나는 텍스트를 좀 더 생동감 있게 바라보게 되었고 나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해석해 나갔다. 세상에 대한 해상도가 높아져 가는 길에서 나의 오개념을 곳곳에서 마주했다. 그래서인지 진리를 추구하게 됐고 당연하거나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전부 의심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의심은 깊어갔고 간혹 데카르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진리를 진지한 태도로 다루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면이 좀 더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진리로 밝혀지던 그것에 의미부여 하는 사람은 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찾은 순수함과 진지함은 내면의 단단함과 지적인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내면의 성장에 집중하여 몇년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과거의 나를 벗어나 저 멀리 와버렸고 거의 처음으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누군가 나의 특성을 단어로 작성하라고 한다면 고지식한 단어 같지만 나는 순수함 그리고 진지함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