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라는 괴물

by 최은규

얼마 전에 부업 용돈벌이를 해보겠다고 작은 개발 프로젝트에 입찰을 했었다. 웹 페이지에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작은 프로젝트였는데, 내가 해봤던 작업과 유사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지원서를 넣고 클라이언트 미팅까지 진행이 됐고, 과정이 꽤 순탄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화상 미팅을 끝내고 카페에서 나오면서 괜히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니는 회사일 이외에도 온전히 100% 책임지는 마감기한을 하나 더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프리랜서를 하면 사장님이 여러 명 되는 기분일 것'이라고 쓰여있던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다행히(?) 프로젝트가 낙찰이 되지 않아서 회사와 외주 두 마리의 마감 괴물에게 쫓기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누구나 학창 시절 시험기간이라는 괴물에 쫓기느라 불행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는 100분 토론마저 재미있던 그 시절, 매번 반복되는 중간/기말고사는 끔찍함 그 자체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만화가, 개그맨, 유튜버, 작가처럼 주기적인 마감을 지켜야 하는 콘텐츠 창작 직업인들을 깊이 존경한다. 보통 사람들은 내면에 무언가가 생성'되면' 외부에 표출을 한다. 하지만 마감이 있는 사람들은 내면에 무언가를 생성'해야'하는 능동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창작의 고통을 견디며 매주 결과물을 내놓는다니, 아무리 익숙해지고 패턴이 생긴다 한들 불안함과 친구처럼 지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취미이지만 나도 브런치에 가급적 매주 글을 쓰려고 노력해 보니, 사람이 마감에 쫓기게 되면 무의식이 나서서 소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틈만 나면 메모장에 글쓰기 주제를 적어놓곤 한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역동적이지 않은 나는 아마 머지않아 소재가 떨어질지 모른다. 만약 글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소재가 쌓일 때까지 마감을 미뤄야 할 것이다. 그것도 취미의 영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직업이 된다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마감은 사람의 생산성을 높여주지만, 한편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기도 하다. 라이브 TV 토론은 마감의 극단적인 예이다. 토론은 상대방의 주장을 매우 짧은 마감 시간 안에 반박을 해야 하는 활동이다. 답변이 2초만 늦어져도 '팩트 폭행 맞고 벙어리가 됐다'며 유튜브에 편집본이 박제되는 사회적 처벌을 받는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논객도 답변을 유예하기보다는 궤변이라도 내놓는 선택을 하는데, 나는 이게 정치 논객들이 시간이 갈수록 망가지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감이 내 정신을 좀먹고 있다면, 그 굴레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 번 돌아볼 필요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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