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원근감

제자리에 두고 떠나자, 고마웠던 그것을

by 최은규

우리가 겪는 부정적인 감정 중 많은 부분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인식을 바꿈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격투기 선수라고 맞을 때 안 아플 수는 없는 것처럼, 모욕을 당할 때, 누명을 쓸 때, 소중한 사람과 이별할 때처럼 나의 마음가짐과는 무관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스토아 철학과 같은 감정 통제형 사상은 이런 상황마저 인식을 바꿈으로써 제어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해 보았지만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며, 오히려 그러한 시도가 또 다른 불필요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찰과 실험 끝에 결론을 내린,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적어본다.



감정을 인정하기

나쁜 일이 일어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가? 우선 축하드린다. 당신은 사이코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이 복잡하고 험난한 행성에서 조상님들의 생존과 번식을 가이드한 최첨단 강화학습 기반 추론모델이다. 따라서 당신의 존재는 30억 년의 품질검사를 통과한 알고리즘의 'QC pass' 스티커다. 부정적인 감정은 당신에게 닥칠 나쁜 일들을 감지할 수 있는 무엇보다 유용한 인지 도구라는 뜻이다. 가끔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해 이 모델이 고장 난 사람들은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다. 스스로 인간미가 있음에 감사해하자.



'곱빼기로 변경' 버튼 누르지 않기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당장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가 여부다. 당장 일어난 감정은 객관적인 상황보다 훨씬 커 보인다. 눈앞의 손바닥이 온 하늘을 가리는 것처럼, 당장 일어난 감정은 내 행동의 판단 기준에서 실제에 비해 과장된 비중을 차지한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이 감정에 적정한 시간 가중치를 매겨서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처신한다. 아예 감정이 격해져 시간 가중치 모델마저 고장 날 것까지 대비해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는 지킬 것"과 같은 원칙을 세우는 것도 매우 현명한 방법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이 유발하는 추가적인 상황 악화만 잘 제어해도 인생이 훨씬 편해진다. 같은 수준의 논란이 터져도 끝없이 추락하는 유명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리에 두기

부정적인 감정을 제자리에 두고, 시간의 원근감을 따라 작아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자. 가능하면 손도 흔들어주자. 알고 보면 나쁜 상황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나타나준 고마운 친구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원망, 분노, 부끄러움 같은 감정은 알고보면 시기 적절하게 그곳에 있던 존재를, 당신이 지금까지 불필요하게 끌고온 것 뿐이다. 이제 그것들을 그만 놓아주는 것은 어떨까? 현재의 당신과 당신의 과거를 위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