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 고백, 그리고 행복의 라그랑주점

by 최은규

비자발적 착취

얼마전 철물점에서 육각렌치 세트를 구입할 일이 있었다. 제일 저렴해보이는 중국산 제품을 집어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나는 2~3만원 정도의 가격을 예상했는데, 9천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이 육각렌치 세트가 만들어져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과정을 떠올려보았다. 설계부터 시작해 제조, 검수, 포장, 출하를 거쳐 컨테이너선을 타고 국내에 들어와 세관을 거친 후 도소매 체인을 따라 이 철물점에 걸려서 내 손에 들어오는데 단돈 9천원. 유통에서 남는 이윤을 떼고, 중국 공장에서 챙기는 이윤을 떼면, 중국 노동자에게 얼마나 작은 몫이 주어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래 전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험준한 산맥을 운전하는 인도 버스기사는 교통 인프라를 갖춘 유럽의 버스기사보다 실력에 비해 형편없는 임금을 받는다는 말. 노동의 대가는 그 노동의 난이도나 노동자의 실력에 달려있지 않고, 노동을 제공하는 대상의 부유함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나는 자본이 축적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덕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내가 화이트칼라랍시고 편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누군가는 보건안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공장에서 매캐한 금속 기체를 들이마시며 생명을 갈아넣고 있을 것이다.



자발적 착취

최근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나,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100% 문명과 단절된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의료나 공구 같은 문명의 도구가 필요했다. 나는 자연인들이 문명의 좋은 부분만 쏙 빼가는 영리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더 편하고 여유로워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보인다. 과거에 짐을 싣고 내리는 하역기기가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배를 부두에 붙이면 인부들이 손수 화물을 하역하느라 보름이고 한 달이고 부두에 정박을 했다고 했다. 할 일이 없는 선원들은 상륙을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내가 승선했던 LNG 운반선은 입항부터 출항까지 채 24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괴물같은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12시간이면 수만 톤의 화물을 싣고 내린다. 항해사들은 하역 중 배가 1도라도 기울까봐 노심초사하며 화물과 평형수 밸런스를 맞추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다. 상륙이랍시고 나간다 해도 채 몇 시간 되지 않는다. 과일이나 사서 돌아오는 게 끝이다. 세상이 이렇게나 발전했는데,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일하는 인간은 더 바빠지고, 복잡함에 불안해지고, 신경증적으로 변했다. 문명인들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세상에 로또 말고는 공짜로 주어지는 돈은 없다. 더 높은 연봉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책임이 큰 만큼 바빠지고, 일은 어려워진다. 대기업엔 똑똑한 사람들밖에 없어 경쟁은 치열해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나빠진다. 부모님이 주신 돈도 공짜는 아니다. 내 삶의 방향을 어느정도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맞춰드려야 한다. 대기업 회장님이 공짜로 돈을 줬다면 상황은 더 껄끄럽다. 골프도 쳐드리고, 불러낼 때마다 튀어나가 말동무도 해드려야 하고, 명절마다 선물도 보내고 안부 문자도 남겨야 한다. 사업을 한다면 더더욱 불행해진다. 하루도 마음 편히 쉴 날이 없고, 불안하고, 월급날이 체감 상 2주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고 느낄 것이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현대인들은 기꺼이 스스로를 문명의 발전에 갈아넣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친듯이 스스로를 착취해왔다. 덕분에 국가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많은 자본을 쌓았다. 나는 그 기반 위에 덩그러니 태어났고, 운이 좋게도 스스로를 착취하는 부유한 한국인들을 상대로 적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먹고 산다. 덕분에 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노동력을 훨씬 싼 값에 착취해올 수 있다. 이 얼마나 기막힌 행복의 균형점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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