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본능

by 최은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내가 대학생 때 멋모르고 읽다가 불면증을 고치게 된 고전 명작이다. 책을 펼칠 때마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완독은 못 했음에도, 이 책에서 본 '제작 본능(instinct of workmanship)'이라는 개념은 무슨 이유에선가 10여 년이 넘도록 내 머릿속에 맴돌다가, 최근에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프레임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이 있다. 첫 번째는 제작 본능이다. 이는 인간이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추구하는 성향을 말한다. 두 번째는 허영심으로, 인간이 본인의 지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어떤 개인이든 제작 본능과 허영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비율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제작 본능이 강한 누군가는 평생을 과학 연구에 매진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납작하고 시끄러운 자동차처럼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위치재(positional goods)에 목을 맨다. 개인 차원을 넘어 한국처럼 유난히 허영심이 강한 사회 또한 존재한다.


제작 본능이 이끄는 삶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 본인이 좋아하며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하이칙센트가 말한 몰입(flow)의 상태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몰입은 끊임없는 동기부여와 성취감을 느끼게 하며, 매일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준다. 전문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운이 좋으면 부도 찾아온다.


허영심이 이끄는 삶은 높은 확률로 불행하다. 사회적 지위는 한정된 자원이고, 획득할 확률 자체가 희박하다. 운 좋게 높은 지위를 얻더라도, 비슷한 집단 내에서 체감하는 상대적 위치는 다시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허영심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지위감을 높이기 위해 과시적 소비에 손을 댄다. 직업을 그저 사치품을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 아니면 직업 자체를 지위의 수단으로 삼는다. 직업의 콘텐츠는 소외된다. 본인이 하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지위로 인한 만족감은 언젠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싫어하는 직업만 남게 된다. 유예된 행복은 끝내 오지 않는다.



나는 제작 본능을 따라 항해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직업을 바꿨다(사실 중간에 수산양식 엔지니어가 되려고도 했었다). 항해사는 물론 멋진 직업이다. 무엇보다 실용적인 일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정해진 절차대로만 운행하는 일이다. 초딩 때부터 방구석에서 톱질을 해대던 나의 제작 본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에서도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던 나는 결국 개발자가 되었다. 커리어도 연봉도 초기화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때가 대부분이다.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행복은 유예되지 않고, 지금 나와 같이 있다.


만약 내 제작 본능이 메이킹보다는 유지보수에 흥미를 느끼는 쪽이었다면 승선을 계속했을테고, 그런 삶도 행복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허영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30억짜리 더퍼스트GTX로얄어쩌고 하는 아파트를 사는 게 인생의 목표였다면 억지로라도 계속 승선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내 삶이 행복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제작 본능을 따르는 삶도, 운이 많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허영심이 DNA에 내장되어 있거나 제작 본능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나? 아니면 수학을 잘하던 조선시대 양반처럼 개인의 흥미가 시대에 맞지 않아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수도 있다. 성별의 차이로 인해 '사물'에 대한 관심도 자체가 낮은 경우, 한국과 같은 제조업 국가에서는 개인의 적성이 경제적 보상과 연결되기 힘들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지금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황이 변하면 이런 삶이 여의치 않아 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라는 외부의 시선보다는 제작 본능이라는 내면의 방향성에 무게를 두는 삶이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사실 내가 배를 내린 진짜 이유는, 나의 사랑하는 와이프와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소망이 매우매우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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