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를 읽고

by 최은규

4~5년 전쯤인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인터넷에 텍스트 파일로 돌아다니는 조악한 번역본이었다. 낚싯줄에 걸려 배를 통째로 끌고 가던 청새치를 겨우 잡아 뭍으로 가는 길에, 상어에게 물고기 살점을 모두 뜯기고 마는 한 노인의 이야기였다. 퓰리쳐상과 노벨상으로 유명했던 소설이었기에 기대보다는 좀 시시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감이 잘 안 왔지만, 굳이 해설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큰 감흥이 없었다고 생각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살아가는 내 머릿속에 꽤나 자주 떠올랐다. 노인이 뼈만 남은 청새치가 묶인 배를 매어놓고 육지로 터벅이며 올라오는데, 해변가 사람들이 배에 묶인 커다란 생선뼈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잊을만하면 내게 찾아와 끊임없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언어로 명확히 풀어낼 수 없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노인은 타인과 완벽히 고립된 바다에서 끈질긴 사투를 벌였다. 그 누구도 그게 어떤 물고기인지, 여정이 얼마나 길어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경험, 직관과 판단 아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다. 새파란 외로움 속에서도 절대 낚싯줄을 끊지 않았다. 비록 뼈만 남은 물고기를 가지고 처연하게 육지로 돌아왔지만 그가 겪은 고난에는 결과와 무관한 모종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노래 <비상>의 가사처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때가 있다. 그 어떤 외부 기준이 없는 고립 속에 오직 스스로를 믿고 결정하고 따르며, 이따금 자신을 해칠 만큼의 인내로 어떤 결과를 위해 투쟁하는 때 말이다. 그 결과물이 때로는 형편없거나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책임 아래 악착같이 끝을 보고야 마는 인간의 근성에는 요즘 보기 힘든 날것의 낭만이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타인의 기준과 평가 그리고 돈으로 귀결되는 결과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현대 사회와, 그 속에 찌들어가는 나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무엇이 내 삶의 의미를 정의하고,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지, 낚싯줄을 끊지 못해 앙상한 생선뼈 앞에 만신창이가 되어 육지를 밟더라도 다음 항해를 의연하게 준비할 마음가짐이 되었는지 되물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노인과 바다>의 해설을 찾아 읽어보질 않았다. 헤밍웨이가 풀어놓은 청새치에 홀로 수년간 끌려다니다 얻게 된 생선뼈를 이곳 브런치에 올려 놓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평] Peak - 노력이 당신을 배신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