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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규 Jul 23. 2024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 대한 미세한 최첨단의 결론

 인생은 뭘까? 내가 가진 의식은 무엇이고 이 세계는 왜 존재하는 것이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가 뭐길래 이 땅 위에 살다 간 수 많은 현인들조차 마땅한 답에 합의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시도때도 없이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느끼는 모든 물질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오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무(nothing)의 상태가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대체 왜 내 눈 앞에 놓인 물건이, 건물이, 땅이,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


 종교를 가진 이에게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 지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하며 그렇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신은 왜 있을까? 사실 직관에서 오는 신기함이라는 느낌조차, 나의 정신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뇌 속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이란 것도 생존을 위해 발달한 정신작용일 뿐일 텐데, 이 느낌이 세상의 부정할 수 없는 공리(axiom)로 작용할 수 있는지, 그래서 물리학 공식과도 같은 객관적 사실을 도출할 수 있는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현대에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인문학 서적이나 고전보다도 과학 지식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철학은 다윈의 진화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과학이 밝혀내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사실들도 지금껏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해왔던 도덕률 같은 ‘정해진 무언가’는 없음을 시사한다. 더욱 회의적이고 물리 환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에서 수학 및 물리법칙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교 서적들이 설파하던 도덕률도, 유물론적 변증법이 예고했던 역사적 정반합도,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인권도 사실은 인간의 망상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과거에 자신의 생각을 진리로서 지엄하게 설교하던 위대한 현자들이 현시대에 살아 돌아와 현대 과학을 접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과학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인간의 삶에는 어떤 우주적 의미도, 목적도 없다. 허나 데카르트의 사고실험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나 자신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다. 비록 내가 인지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실험관 속의 뇌 또는 매트릭스 속의 디지털 세계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따르는 것은 나의 욕망밖에 없다.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을 때도, 인지했을 때도 변하지 않는 명제이다. 인간의 삶, 인간의 행동에는 욕망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속세의 욕망을 벗어버리고자 수행하는 불교도들도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욕망을 좇는 것뿐이며, 기부와 봉사활동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자기만족이라는 인간 행동의 본질적 동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고자 스스로 내키지 않는 온갖 행동을 해 보이며 반증하려는 사람조차, 이 명제를 반증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 속에 있을 뿐이다.


 즉 인생이란 나의 뇌 안에 꼼짝 없이 갇혀 있는, 수십억 년의 진화가 빚어낸 온갖 욕망의 줄다리기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삶에 대한 가장 깨어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조차 나 스스로가 결정했다고 볼 수 없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 내가 가지고 태어난 기본적 욕구들, 모국의 언어, 내가 태어난 시대, 자라온 환경, 우연히 읽은 서적들, 우연히 접한 타인의 생각들… 이 조합이 유일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고유한 나만의 것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아니, 없다. 우리가 생각의 도구로 쓰는 언어부터가 수십만 년간 조상과 문화가 빚어 놓은 분절된 의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개인의 손에 들린 삶의 재료 중 ‘고유’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욕망도 감정도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회의하면 무엇이 남을까? 무엇을 바람직한 삶이라고 정할 수 있을까? 차라리 종교적 착각 속에 일평생을 지내는 것보다 무엇이 더 나을까? 나는 한때 환원주의적 허무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물리적 현상일 뿐이라면 무엇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인가? 윤리학, 법학, 철학 등 인문학적인 것들을 보면 정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정할 수 있는 냥, 그것이 진리인 냥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을 때는, 죽음의 상태가 번민하는 이승의 삶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다. 사후에 올 영겁의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조차, 죽은 육신은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조차도 또다른 욕망인 것을 인정하고 나면, 내가 가진 욕망을 착실하게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어떤 마음을 먹든, 나라는 인간은 욕망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음을 먹는 나는 누구고, 욕망을 따라 행동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의식과 의식인가? 별개의 자아인가? 어떤 것을 우주의 객관적 진리라고 해서 따르는 것과 자신의 마음 내면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종교적 신념의 삶이고, 후자는 방법론적 삶이다. 어떤 삶이 더 나은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전자는 심할 경우 밥숟가락을 들고 놓는 것조차 신이 정해 놓은 황금률이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많은 이들이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애초에 목표라는 건 없다. 그저 눈먼 진화의 과정에 놓여있는 특수한 원자 조합의 물리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왕에 살아간다면 더 없는 만족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만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내려올 필요가 있다. 회의적인 태도도 결국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큰 만족감 속에서 살다 가는 것을 가치로 삼고, 나머지는 그 방법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다. 따라서 인생을 정의해보자면, ‘더 큰 만족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을, 어떤 마음을 먹으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지 궁금했다. 그리고 늘 실패해왔다. 최근에 와서 깨달은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라는 사실이다. 어떤 일에도 마음이 힘들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것은 당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의미다. 감정은 죽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해 생긴 감정을 뚝딱 없애는 것은 약을 먹거나 마취를 당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성은 무의식이라는 고집 쎈 말의 고삐를 쥔 무기력한 기수 아니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의식의 세계는 크고 깊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물 밖에 떠있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불안과 고통은 어떤 의식을 갖는다 해서 마법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다. 부처는 이것을 이미 수천년 전에 깨달았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쾌락을 추구하는 그 번민 자체가 불행이라고. 좋았던 순간도 미련 없이 보내주고, 고통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불행이기를 멈춘다. 세상은 부질없는 것들의 덧없는 떨림이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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