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배움 씨는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하면 수치스러운 일을 겪게 되는지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면접에 떨어져도 본인이 모르는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상사에게 잡도리를 당해도 일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사기를 당해도 세상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말실수를 해서 곤란해져도 인간관계를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기이할 정도로 꿋꿋하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 숨어있을 일을 겪어도 뭐든 배웠으니 됐다며 의연하게 살아간다.
어쩌다 배움에 미친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는 뭐라도 배우기 위해 일부러 실패를 찾아다디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탁을 하고, 글을 올리고, 말을 걸고, 투자를 하고, 제안 메일을 보내고, 엉뚱한 걸 만들고, 농담을 던지고, 모임을 조직한다. 결과는 대부분 거절, 외면, 면박, 무시, 낭비, 갑분싸, 흐지부지이지만 그에게 실패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건반을 잘못 누르는 일만큼 당연하다. 어떤 면에서는 자존심조차 없어 보인다. 그가 왜 배움을 갈구하는지 고찰해 보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외려 진정으로 뻔뻔하고 전략적인 자아가 숨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날 그에게 왜 자꾸 배움 타령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말하길, 사람들은 늘 성공하는 길을 예측하려고 한단다. 하지만 인간의 예측력은 형편없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 고수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실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직접 겪어보는 것이란다. 그래서 반복되는 실패의 고통을 견뎌낼 방법이 필요한데, '그저 배웠다'라고 생각할 때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겐 수치심 같은 게 거의 없냐 물었다. 그건 아니고, 외려 적절한 수치심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흑역사는 영원히 기억되듯이, 실패가 정보로 체화되는데 그만 한 게 없다고.
그에게 있어 실패는 그저 정보의 원천이요, 고통은 그 정보를 뇌에 새겨 넣는 잉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배움을 중얼거리는 습관은 실패라는 끈적한 경험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필요한 정보만 얍삽하게 정제해 내기 위한 고도의 언어적 프레이밍 전략이었다. 김배움 씨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실패가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 극한으로 최적화된 냉철한 학습 기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