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허무맹랑해야 해

삶의 권태에 관한 소고

by 최은규

추억보정이라는 사기

게임 중독자였던 나는 초등학생 때 '임진록2 조선의 반격'이라는 CD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 밤낮을 모르고 열심히 하던 때, 집에 놀러 온 친척 동생이 실수로 CD에 콜라를 쏟는 바람에 그 게임을 못 하게 됐다. 부모님께 새로 사달라고 하면 됐을 일인데 순진했던 나는 영영 그 게임을 할 수 없게 됐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리움 속에 몇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그 게임을 CD 없이 설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플레이해 보았다. 그런데 웬걸 그래픽도 구리고 별 재미도 없었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게임이 맞는 걸까? 큰 실망감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을 끄고 말았다.


이런 패턴으로 내가 추억의 게임을 다시 플레이해 보고 실망한 게 족히 열 번은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가정과 기대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 수도 없이 목격하고도 학습하지 못했다.



행복가정법의 배신

고등학생 때도 여전히 게임 중독자였던 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이라는 게임을 열심히 했다. 그 게임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배를 타기 위해 밤낮을 노력했다. 그 배를 타기만 하면 정말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나를 잠도 안 재우고 닦아 돌렸다. 장장 8개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그 배를 소유하게 됐는데, 그때 겪은 허무함은 내 생에 가장 큰 충격이었다. 막상 이루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기만 하면 행복할 거야'라는 기대감이 나를 어떻게 조종하고 끝내 배신하는지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관련 글: 행복에 대한 흔한 착각)


박진영 씨는 20대에 20억을 벌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가, 막상 20억을 벌고 나니 허망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행복에 대한 가정이 게임에서 나오고, 또 누군가는 돈에서, 명예에서, 차에서, 결혼에서 나온다. 그 대상만 다를 뿐 사실 인류가 수만 년을 반복해 온 전통적인 패턴이다.



권태라는 질병

추억보정과 행복가정법의 사기 패턴을 눈치채 버린 탓일까, 요즘 나는 삶이 좀 권태롭다. 지적으로 정직하자는 성찰은 내 존재의 무의미와 성취의 허망함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삶의 재미를 벗겨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는 삶이라니. 헛된 기대의 다른 이름은 즐거움이었나 보다.


일론 머스크는 매일 아침 우리가 화성에 가고 다른 행성에 진출하는 기대와 꿈에 젖어 일어난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냥 '멀쩡한 지구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면서 무슨 화성타령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저렇게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부럽다. 저런 꿈이 '꾸어진다는 사실'이 부럽다. 내가 게임 속에서 가지고 싶었던 배는 8개월짜리 유효기간을 가진 꿈이었다. 반면 거대한 꿈은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 평생 놀고먹을 재력만큼 부러운 도파민 화수분 아닌가. 그런 꿈이 꾸어지는 순수함과 큰 기대를 품을 수 있는 가슴이야말로 삶의 권태에 면역이 되는 유일한 항체인 것 같다.


계란프라이에 성공한 후 요리사가 되겠다고 방방대던 어린 시절의 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대던 학창 시절의 나, 새우양식을 하겠다며 사방팔방 돌아다니던 20대의 내가 부럽다. 주변 누군가가 기대에 부풀어 있다면, 그 소중한 열기구를 냉소로 찌르지 말 일이다.




노래 한 곡 듣고 가시자

https://www.youtube.com/watch?v=pTD9Jysi3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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