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경기도 소재의 S고등학교 교무실 앞. 윤슬이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다. 신발 끝으로 애꿎은 바닥의 타일을 톡톡 걷어차기도 하고, 작은 원을 그리고 또 그려 넣기도 한다. 발끝을 움직이는 사이로 타일 틈새의 섬세한 무늬가 눈에 들어온다. 미세한 균열이 얽혀 있는 그 무늬는 마치 오랜 시간 외면당한 감정의 흔적 같다. 주변은 고요하다. 가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낮게 울리는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고개를 들자, 복도 창문 너머에서 한 겹 유리에 갇힌 여자애가 물끄러미 마주 본다.
윤슬의 손에는 며칠 전 치른 중간고사 성적표가 단단히 접힌 채 쥐어있다. 구겨진 모서리가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틈으로 삐져나왔다. 윤슬은 신발 끝으로 다시 바닥에 원을 그렸다. 조그만 원이 점점 커지다가 끊겼다. 그 순간, 교무실 문이 열리며 한 친구가 나왔다. 상담을 마친 친구는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윤슬은 잠시 그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슬이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슬이 왔네. 이번 시험 성적이 생각보다 조금 낮게 나왔더라.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아뇨.”
“대학은 갈 거지? 생각하고 있는 학교나 학과가 있으면 말해봐. 좋아하는 일이나 되고 싶은 장래 희망을 말해도 좋고.”
‘내가 뭘 좋아하지? 뭐가 되고 싶더라?’
어릴 적부터 막연히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 중에는 벌써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애들도 있었다.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윤슬은 그들의 또렷한 목표를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사실 확실히 정한 건 없어요. 제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친구들은 다 자기 꿈이 있던데 저는 아직 확신이 없어서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 아냐? 대학은 이미 완벽한 사람을 찾는 곳이 아니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키워 주는 곳이지. 게다가 선생님이 보기엔 슬이는 여러 방면에서 재능이 많다고 느끼고 있어. 그림도 잘 그리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같은 반 친구들한테 들었는데 작곡도 할 줄 안다며?”
“그냥 취미로 조금씩 할 뿐이에요. 하지만 다들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제가 이걸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슬아, 그건 당연한 거야.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너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비교가 아니야. 네가 얼마나 즐기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는지야. 게다가 넌 팔방미인이잖아. 네가 가진 다양한 재능은 단순히 한 가지가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그림, 글쓰기, 음악… 이 모든 걸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 네 재능은 그 자체로 특별해.”
슬은 담임의 과한 칭찬이 민망하고 쑥스럽긴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감사하단 의미로 고개를 숙여 멋쩍게 인사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수학 선생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윤슬을 쳐다봤다.
“팔방미인? 다 소용없어.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하지. 이 땅 저 땅 헤집어 놓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몰라?”
옴폭 들어간 눈을 홉뜬 채 말하는 수학 선생의 입가에 개구리 거품처럼 하얀 침이 한가득 품어져 나왔다. 슬은 그 모습이 소름 끼쳐 애써 외면했다.
“슬이는 한 우물만 파기에 너무 아까운 재능을 가졌는걸요. 그리고 한 우물만 파도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다 옛말이에요. 세상이 달라졌다고요. 이젠 다재다능한 인재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된 거 모르세요?”
담임이 슬이를 두둔하고 나서자 수학 선생이 못마땅한 듯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구시렁댔다.
“재주가 12가지면 밥 굶는다는 우리 속담이 왜 있겠어. 말이 좋아 다재다능한 거지, 어느 하나 확실한 재능이 없다는 소리 아냐? 하여튼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니까.”
내가 도대체 뭘 잘 못 한 거지? 슬은 자신이 왜 이런 독설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막말이 한두 번도 아닌데 좀처럼 적응이 안 됐다.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구나, 슬은 새삼 깨달았다.
독설가 수학 선생은 별명 부자였다. 선생이 별명이 많다는 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했다. 인기가 높거나, 악명을 떨치거나. 수학 선생의 경우엔 후자에 속했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이’ ‘스마일ㅆㄴ’ ‘미친개’로 통했다. 윤슬이 슬쩍 돌아보니 ‘미친개’ 수학 선생이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별로 넥타이를 갖춰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 따라 바꿔 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빨간색 넥타이를 맸다는 건 현재 기분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 잘 못 걸렸구나, 피할 수도 없으니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밖에. 그런 윤슬의 생각을 쳐내듯 다시 수학 선생의 독설이 파고들었다.
“너도 수포자야? 중간고사 성적이 그게 뭐야? 그렇게 같곤 인 서울도 어려워.”
무안을 당한 윤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울어버리면 수학 선생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야. 한 선생님이 워낙 직선적이시잖아. 그렇지만 뒤끝 없는 분인 거 알지?”
담임이 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슬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데 뒤끝까지 있으면 그게 인간이냐고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윤슬은 거칠고 무례함을 솔직함이나 직선적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학 선생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슬은 상처받지 않은 척 의연하게 행동하고 싶은데, 잘되지 않았다. 마음의 둑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학 선생에게 미움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단순히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슬의 약점을 정확히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슬의 마음속 깊은 곳엔 자신의 인생이 2류에 머물다 끝나 버릴 것 같은 불안감과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담임은 팔방미인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알고 보면 모두 잔재주에 불과했다. 수학 선생의 말처럼 무엇 하나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런 슬에게도 한때 남부럽지 않은 꿈이 있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는 꿈. 슬은 어린 시절 발레복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우연히 무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발레리나에 끌렸지만, 점차 우아한 춤 동작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 무수한 연습의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에 매료됐다. 부모님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슬이는 공부엔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예체능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슬은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3년까지 약 10년 가까이 세계적인 무용수를 꿈꾸며 발레에 매진했다. 그러나 슬은 불행하게도 타고난 발레리나는 아니었다. 슬은 연습벌레였지만,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의 한계가 존재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콩쿠르에선 번번이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사실 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발레를 좋아하고 춤을 추는 것이 행복했지만, 자신에겐 무용수로서의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습 중 연이은 부상으로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됐다. 슬은 결국 예술고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야만 했다. 오로지 무용밖에 모르고 살았고, 할 줄 아는 것도 무용뿐이었던 슬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춤이 빠져나간 자기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삶에는 한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야. 가던 길이 막히면 돌아가면 돼.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널려 있어. 다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어느 방향의 길을 선택하든 우린 항상 널 지지하고 응원할 거야.”
가족들은 상실감에 빠진 슬에게 용기를 주려 노력했다. 슬도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한다는 캠프나 자기계발 지원 프로그램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것저것 도전하다 보면 다양한 체험이 자신의 인생을 훨씬 풍성하게 해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실제로 세상엔 많은 직업과 학과가 있었다. 그중엔 슬이 재능을 보인 분야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기엔 아까운 애매한 재능이었다. 희망 고문이 따로 없었다. 내년이면 고3이 되는 슬은 아직 확실한 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게 불투명했다. 이대로 만년 2등 신세를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우울하고 조바심이 일었다.
“수고했어. 그만 교실로 돌아가도 좋아.”
내면에 침잠해 비극과 희극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슬을 담임이 현실로 소환했다. 슬은 자신을 쳐다보는 수학 선생을 의식적으로 외면한 채, 담임에게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소심한 복수였다. 뒤통수가 따갑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슬의 등 뒤로 담임과 수학 선생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한 선생님 아들, 이번에 들어간 회사엔 잘 적응하고 있죠?”
“그놈 때문에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니까. 좋은 대학 나왔다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한 직장에 진득하게 붙어있지를 못하네. 이번에 들어간 직장도 3개월을 못 버티고 때려치웠어. 내 원 참!”
교실을 빠져나오는 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교무실 문이 저절로 닫히며 수학 선생의 푸념은 점점 희미해졌지만, 슬의 머릿속에 그의 마지막 말이 작은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하지. 이 땅 저 땅 헤집어 놓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몰라?”
복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슬은 창문 밖으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균열 진 타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어쩐지 그녀 자신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