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새 몸무게가 8킬로나 줄었다. 입맛이 사라졌고, 말을 잃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인데,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이 더러운 감정들을 흘려보낼 수는 없을까?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탓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수북이 쌓인 먼지가 신경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청소라도 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면 몸을 혹사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없는 힘을 짜내 청소기를 돌리고, 밀걸레로 방과 거실을 닦아낸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파 위로 풀썩 내려앉았다.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블랙홀이 이런 걸까? 현기증이 났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틱스강의 문이 열리고 죽음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이 덮쳤다.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단숨에 빠져들었다.
나는 길 위에 있었다. 밤인 듯 주위는 어둡고 고요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발길을 재촉했다.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좀처럼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었다.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어느 순간, ‘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나는 꿈속에서 자각몽 상태임을 깨달았다. 요즘 부쩍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을 반복해서 꾸던 터라 이번에는 꼭 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높은 언덕 위,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아파트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우리 집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달리듯 내처 걸었다.
이내 집 앞에 도착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바로 거실이 나타났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거실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감고 우리 집 거실을 재현하려고 기억을 끌어모았다.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벽에 걸린 커다란 가족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었다. 가족사진 속의 세 사람.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를 쏙 빼닮은 아들 ‘우주’. 세 식구가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바라보던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얼굴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남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저 남자가 내 남편이 맞기는 한 걸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남편이 주방에서 그녀와 다정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왜 내 주방에 들어와 있는 거지? 그녀를 바라보며 남편이 웃고 있다. 다정한 눈빛, 애정 어린 표정과 함께. 언제부턴가 내게는 보여준 적 없던 낯선 모습이었다. 분명 우리도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서로를 아낀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한낱 먼지만도 못한 기억의 잔해로만 남았구나.
두 사람은 내가 지금 여기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이혼해 줘!’ 며칠 전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내뱉던 남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울렸다. 미움을 넘어 증오와 분노, 원망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 할까. 남편을 붙잡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할까. 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뒤돌아섰다.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눈앞에 침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도망치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 안. 침대와 옷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발끝에 닿는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얼굴을 들자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은 여러 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그 거울 조각들이 내 얼굴을 잘게 나누어 놓았다. 발아래에는 깨진 거울 파편들이 나뒹굴었다. 흩어진 조각들은 차갑고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빛이 마치 내 심장을 할퀴는 듯한 통감이 느껴졌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 꿈을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자. 이건 단지 꿈일 뿐이야. 나는 손을 뻗어 그 파편들을 집어 들고 퍼즐을 맞추듯 깨진 거울에 붙였다. 제멋대로 꿰맞춰진 거울. 그 속에 비친 얼굴은 나 자신을 스스로 비웃기라도 하듯 어딘가 기묘하게 뒤틀려진 모습이었다. 나는 뒷걸음치듯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거울로 된 벽에 닿았다. 그 순간 스르륵 또 다른 문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곳은 아들의 방이었다. 우리 아들 ‘우주’의 방. 벽에는 아들이 어릴 적 그린 그림 몇 점과 사진들이 붙어있고, 창가에는 천체 망원경이 놓여있었다. 별을 좋아하는 아들의 보물 1호였다. 망원경 본체에는 아들이 직접 꾸민 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 천체 망원경은 단순한 관측 도구가 아니라, 우주 탐험가를 꿈꾸는 아들이 자신의 꿈과 상상력을 펼치던 창구였다. 남편은 나 못지않게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아들을 데리고 천문대를 찾아갈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나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들이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어딘가 불편한 듯 찡그린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암묵적이나마 되도록 아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부모의 감정 상태나 가정 내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요즘 들어 부쩍 눈치를 보고, 우리 부부의 표정이나 목소리 톤을 살피는 태도를 보였다. 이 아이에겐 아무 잘못이 없는데, 남편과 내가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구나. 마음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나는 잠든 아들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어 희미한 달빛이 스며드는 긴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복도를 따라 수십 개의 방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어떤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하나의 방에서 문틈 사이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낡은 나무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 작은 문이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오래된 가구들이 무심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어딘가 무척 낯익은 듯한 풍경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릴 적 내 방에 놓여있던 책상과 침대, 옷장, 아끼고 좋아했던 작은 소품들까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곳에 놓여있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왈칵 눈물이 났다. 그 물건들을 만져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다가가면 모든 것이 한 걸음 멀어졌다. 그리곤 이내 방 안의 공기가 변하고, 물건들의 색감이 흐려지더니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외딴섬처럼 끝없는 공간 속에 혼자 남겨졌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무겁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파고들었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이곳에 갇혀있을 것 같은 두려움도 몰려왔다. 인제 그만 이 방에서, 이 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나는 자각몽임을 상기했다. 내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내가 꿈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없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보지 못했을 뿐이야. 손을 뻗는 곳 어디에나 문은 있어. 언제든 나가기만 하면 돼.”
그러자 밖으로 난 작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커튼 사이로 아주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부드럽게 방 안으로 스며들며 어둠의 경계를 밀어냈다. 따스함이 피부에 전해졌다. 꿈속 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차올랐다. 나는 손을 뻗었다. 정말 그곳에 문이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을 거란 기대감과 그 길에선 더 이상 헤매지 않을 자신감도 생겼다. 망설임 없이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나는 방광을 압박하는 요의에 눈을 떴다. 현실의 문이 열리듯 빛으로 가득한 거실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침대가 아닌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났다. 꿈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구나.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급한 요의부터 해결했다. 비워낸 까닭인지,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정신없이 배 속을 채웠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자판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이어 포털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했다.
“이혼 절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