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만나고 싶었습니다.
� 추풍령의 ‘기러기 할아버지’ 임채홍 씨를 만나다!
기획 및 취재 최연신(하상매거진 인터뷰어)
추풍령 인근의 산자락 깊숙한 골짜기. 봄이면 산벚꽃이 흐드러지고, 겨울이면 눈발이 고요히 내려앉는 그곳에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살아가는 이가 있다. 시각장애인 임채홍 씨. 그는 세상을 눈으로 보진 않지만, 누구보다 선명하게 삶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올해 일흔일곱. 그가 돌보는 건 기러기와 닭, 고양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가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의 하루는 기러기 울음소리로 시작되어, 그 울음소리로 저문다.
이달에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공간에서 오히려 누구보다 충실하게 살아가는 임채홍 씨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생명과 돌봄, 그리고 나눔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낸 어떤 본질을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야기 하나_전쟁 중에 잃은 눈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
임채홍 씨가 처음 어둠과 마주한 건 세 살 무렵이었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몰아치던 어느 날이었다.
“옛날엔 불을 담아 쓰는 화로가 있었어요. 폭격 소리에 놀라 넘어지면서 뜨거운 화로에 부딪히고 말았죠. 그 충격으로 양쪽 눈 모두 완전히 시력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빛도 감지되지 않아요.”
시력을 잃은 이후, 그의 세상은 소리와 촉감, 냄새, 그리고 기억으로 구성되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멀리서 들려오는 폭격 소리, 발밑을 울리는 진동, 그리고 점차 밀려오는 깊은 어둠뿐이었다. 그는 대신 세상을 손끝과 귀로 껴안았다.
1958년, 그는 인천의 광명원에서 특수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맹학교로 옮겨 고등부 4기로 졸업했다. 1970년 1월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배울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진로는 안마사나 전화 교환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는 졸업 후 서울 노량진에서 한약업에 뛰어들었다. 침술과 한약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직접 약재를 배우며 한약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여의치 않은 사정 끝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손에 익은 일을 시작했다. 한약과 침으로 마을 사람들의 병을 돌보며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제 몫을 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또 다른 화제가 됐다. 작은 마을 특유의 빠른 입소문은 단골을 불러들이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 편견도 함께 불러왔다. 손님은 많았지만, 그 신뢰가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10여 년간 지방에서 버티던 그는 결단을 내렸다.
“이젠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1980년, 그는 다시 서울 땅을 밟았다. 당시 신월동에 집을 마련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간판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는 다시 한약을 지으며 삶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져 골목 안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양쪽 골목에 사람들이 길게 앉아 있는 풍경은 장사진을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불거졌다. 신고와 고발, 의혹과 불신이 골목을 뒤덮었던 것. 결국 9개월 만에 그는 다시 그 집을 팔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향에 내려온 뒤에도 잠시 다시 한약업을 재개했지만, 그마저도 신고와 단속 앞에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틀었다. 안마 시술소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제도라는 이름의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관련 단체의 허가를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더군요. 처음엔 500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했어요.”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에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전국 안마사 연대를 조직하고, PD수첩에 출연해 구조의 모순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진실을 외치는 이의 목소리는 때때로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 되었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유력 단체의 거센 반발 끝에 그는 ‘협박과 갈취’ 혐의로 고발당했고, 결국 구속됐다. 계좌에 입금된 2,500만 원의 후원금은 ‘갈취의 증거’로 둔갑했으며, 검찰은 그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나중엔 1년 형으로 줄었지만, 이미 삶은 망가졌죠. 명예도, 신뢰도, 삶의 자리도요.”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세상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고향 마을로 향했다. 마을 한복판, 그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염소 한 마리 사서 의지하며 살아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시골 마을의 소문은 차갑기만 했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어머니 역시 체면과 자존심을 이유로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난 너하고 못 살겠으니 나가라.” 어머니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갈 곳이 없었다. 큰딸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최소한 불이라도 피울 수 있고, 끼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생존을 넘어선 삶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야기 둘_ 다시 시작된 삶, 동물과 함께한 시간
그렇게 시작된 컨테이너 속의 삶. 임채홍 씨는 논바닥 위에 벽돌을 하나씩 깔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진창 위에 얇은 벽돌을 얹고 또 얹었다. 그렇게 겨우 길을 만들어낸 뒤, 입구에 컨테이너 하나를 들여놓았다. 그 컨테이너가 그의 집이 되었다.
전기도 수도도 없던 산자락의 황무지. 그는 페트병에 받아놓은 흙탕물을 가라앉힌 뒤 밥을 지어 먹었다. 겨울엔 나무 난로 하나에 의지했다. 손으로 만져가며 주운 장작을 쪼개 난로에 넣고 몸을 녹였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그는 감각에 의존해 500미터가 넘는 거리의 눈길을 장갑 낀 손으로 헤치며 어머니 집을 들렀다. 그저 안부라도 확인하고자, 하루에도 몇 번이고 왕복했다.
산골짜기 속이라 인터넷도, 통신도 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컴퓨터가 있어야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겠다.” 그는 어머니 집에 놓인 컴퓨터를 활용해 시청 게시판 ‘소리광장’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 말 그대로, 생존의 기록이었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도, 시청 관계자도 그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제설차가 와서 진입로를 열어주었지만, 협소한 언덕길에 차량이 담장을 부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시청은 그의 집 경계선까지 도로를 깔아주었다. 그 길을 따라, 그는 나무를 실어 어머니에게 나르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 언덕은 벽이나 다름없다. 30초 끌고 올라가다 쉬고, 또 1분 끌고 올라가다 쉬었다. 언젠가는 바위를 끌어내다 발등 위로 떨어진 적도 있다.
“그 순간 죽었다 싶었는데, 살았어요. 분명 신이 존재하긴 하는 것 같아요.”
고된 날들을 이겨낸 뒤, 그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닭장을 만들고, 염소를 사들였다. 돈이 없어 동생들에게 빌려 네 마리를 들였으나, 누군가가 얼어붙은 고구마를 던져주는 바람에 염소 네 마리는 급성 폐렴으로 모두 죽고 말았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번엔 딸이 6마리를 사줬다.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키운 염소는 3년 만에 63마리까지 늘어났다. 임채홍 씨의 삶을 다시 일으킨 것은 ‘가족’이었다.
“큰딸은 78년생인데 공대를 나와서 지금은 개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막내딸은 서른셋이고요. 세무사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위와 함께 살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두 딸이 사위들과 함께 농장에 다녀간다. 그 따뜻한 왕래는 그의 고단한 삶에 커다란 기쁨이 되어주고 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그는 지금까지 14년 넘게 철새인 기러기를 기르고 있다. 임채홍 씨가 기러기를 키우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닭이나 염소, 칠면조를 키우는 분들은 많지만, 기러기를 기른다는 건 좀 생소하죠.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기러기는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조류독감이나 어떤 병으로 죽은 기러기는 없었어요. 생명력이 대단해요.”
그는 기러기의 강한 생명력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특히 이 지역이 청정지역이라 병이 발생한 적도 드물다. 그러면서도 기러기는 소란스럽지 않고, 울음소리도 조용한 편이라 사육 환경도 상대적으로 쾌적하다고 말했다. 기러기를 선택한 데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러기알이 참 맛이 좋아요. 영양가도 많고요. 실제로 생으로 먹는 분들도 있고, 알 때문에 키우는 분들도 있죠.”
그는 사육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파트에서 다양한 조류를 길렀다고 한다. 문조, 앵무새, 십자매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조류에 대한 애정과 오랜 관심이 결국 기러기 사육으로 이어진 것이다.
“누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제 취미가 이어진 거예요. 조류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기러기가 철새인 만큼, 도망가거나 날아가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 법하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울타리를 설치하고, 환경을 통제하며 사육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저도 상식이 부족했죠.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이미 기러기를 기르는 농장을 찾아다녔어요. 취재 기사 같은 것도 보고, 기러기의 습성이나 생알을 먹는 문화 같은 걸 배우기도 했고요. 그런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야기 셋_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삶
“낮에는 조심스러워요. 누가 볼까 싶어서요. 그래서 저는 주로 밤에 움직입니다.”
임채홍 씨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앞을 볼 수 없다는 불편함보다 더 그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낮보다는 밤이 편하다는 그는, 이제 완전히 야행성 생활에 익숙해졌다.
“밤에는 누가 보지 않잖아요. 편하죠. 낮에는 기러기 밥 챙기고, 주변 정리 좀 하고… 실내에선 책도 보고, 유튜브도 듣고 그래요.”
하루 수면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 주로 오전 10시쯤 JTBC 뉴스를 들으며 눈을 붙이는 정도다. 본격적인 활동은 오전 11시쯤부터 시작된다. 그의 생활은 비장애인들의 그것과 다르게 흘러가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 리듬 속엔 그만의 철학과 책임감이 있다.
임채홍 씨는 기러기뿐 아니라 닭과 거위도 함께 기른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내려오면 기러기 고기를 선물하곤 하는데, 먹어본 이들은 하나같이 “고기가 깔끔하다”고 칭찬한다. 그도 최근에서야 기러기 알을 먹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며 입이 자주 마르고 침이 마르는 증상이 있었는데, 기러기 알을 먹고 나아졌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제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눠주는 기쁨이 더 커요. 그래서 자꾸 사람들에게 나눠요.”
기러기를 키우는 일이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의 주요 수입은 한 달에 나오는 117만 원의 기초생활수급비다. 그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버거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채홍 씨에게는 오랜 습관이며, 삶의 방식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축을 돌보며 자랐다. 앞이 보이지 않던 어린 시절에도 소를 돌봤고, 작두질로 여물도 썰었으며, 도리깨질도 해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 하지 말아라 하지만, 난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하니까요.”
그에게 동물을 기르는 일은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닌 ‘삶의 습관’이며 ‘보람’이다. 혼자 동물을 돌보며 사는 삶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했다.
“멀쩡한 사람도 눈 오고 얼음판에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잖아요. 저는요, 모이통 들고 언덕도 오르내리며 뛰어다녀요.”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러기 사육과 산속 생활이 그에게 그리 두렵지 않다. 어릴 적부터 낙법을 배웠고, 촌에서 썰매 타며 얼음판을 익힌 그는 넘어지면 ‘자연에 몸을 맡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살겠다고 부둥켜안고 버티면 오히려 다쳐요. 그냥 맡기면 상처는 나도 큰 부상은 없어요.”
말끝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철학이 묻어난다.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위험을 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언덕을 오르며 모이를 나르고, 기러기를 돌보는 일상은 오히려 그에게 활력과 즐거움을 준다.
“사실 알 낳는다고 해도 사료값이 더 들어가요. 돈만 보면 손해예요. 그런데 이걸 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걸 보면, 그 에너지가 그대로 저한테 와요. 그 맛에 사는 거죠.”
임 씨는 단지 동물을 돌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알을 나누고, 사탕이나 소화제 같은 작은 물품도 챙겨서 주위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건넨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그것을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기부를 넘어, 관계를 잇는 삶의 방식이다.
“마을엔 이웃이 없어요. 말이 많아서 일부러 멀리했죠. 여기 들어올 때부터 그런 건 애초에 담을 쌓고 살기로 했어요.”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는 피하지만,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시각장애인 지인들에게 알을 나눠주고, 서울의 동문회에 참석하고, 필요할 때는 딸이 차를 태워 주기도 한다. 그의 삶은 혼자인 듯하면서도,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한 관계망 속에 있다. 학교 시절 타자기를 배울 기회는 놓쳤지만, 졸업 직후 재활공학센터를 통해 기계 타자를 접하며 민원 글을 써주고, 글쓰기 활동을 이어갔다. ‘여은’이라는 잡지에도 참여하며 그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이어갔다.
기러기를 키우며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묻자, 그는 기러기의 날갯짓을 떠올렸다.
“잡으려고 하면 날개를 딱 펴는데, 그 힘이 어마어마해요. 9만 리를 난다더니, 그럴 만하더라고요. 가끔 기러기 똥이 손끝에 묻으면 냄새를 맡아봐요.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알이 몇 개 나든, 팔리든 말든 상관없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움직이고 돌보는 행위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의 농장은 이제 하나의 작은 우주다. 컨테이너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기억이 쌓이는 공간이다. 기러기의 울음소리, 나무를 스치는 바람,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그를 살아 있게 한다.
지금도 그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기러기와 보내고, 나머지는 책을 읽거나, 인터넷으로 소통하거나, 지인에게 한약을 챙겨 보낸다. 그의 삶은 물질적 성과보다도,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증명하는 시간의 누적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를 부탁했다.
“앞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시각장애인이든 누구든, 용기 내서 부딪히면 길은 생겨요. 저는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를 만난 날, 임채홍 씨는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라며 음식을 대접했다. 돌아가는 길엔 기러기알과 버섯도 정성스레 포장해 건넸다. 그가 건넨 선물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그의 삶 전체, 모든 투쟁과 감각과 사랑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장애인의 생존기’가 아니다.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지금은 이웃이고 친구이며, 자신의 삶을 일구는 농장주다. 그는 말한다.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텼어요. 그리고 신이 날 지켜보고 있다는 그 믿음, 그게 날 살렸어요.”
그가 말하는 ‘신의 존재’는, 어쩌면 인간의 존엄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동물을 벗 삼은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기도이자, 작은 기적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그는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고, 무언가를 키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삶은 묻는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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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각장애인을 위한 월간문화교양지 하상매거진 2025년 5월호(통권 제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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