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픽사베이
6월, 절기상 ‘망종(芒種)’에 접어들며 땅은 다시 한번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까칠한 수염을 품은 햇보리를 거두어들이고, 물빛을 머금은 논마다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농부의 손끝은 분주해지고, 땀방울은 햇살보다 먼저 땅을 적십니다. 일찍 심긴 모는 어느새 연둣빛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맘때면 남쪽 녹차밭에도 찻잎을 채취하는 이들의 바지런한 움직임이 푸른 이랑을 따라 이어지겠네요. 햇볕이 좋은 아침이면 이른 잎들이 부드럽게 피어오르고, 그 여린 잎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따낸다고 하지요. 밭 위로 고르게 이어진 초록빛 물결 사이를 누비는 사람들의 손놀림을 떠올리면 묘하게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 듭니다.
내친김에 오늘은 커피 대신 녹차 한 잔을 우려봅니다. 사실 녹차는 저보다 남편이 즐기는 차입니다. 곡우 무렵, 찻잎이 너무 여리지도 않고 지나치게 크지도 않은 시기에 딴 세작을 특별히 좋아하지요. 남편은 쌉쌀하면서도 깔끔한 맛, 여린 단맛과 풀향이 어우러진 은은한 풍미가 마음에 든다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그에 반해 저는 아직 녹차의 맛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처음엔 다소 밍밍하게 느껴졌고, 쌉싸름한 끝맛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이 정성스레 우려낸 한 잔을 건넸을 때, 김이 서린 잔 위로 스치듯 올라오는 향을 맡으며 문득 ‘이 차에는 시간이 담겼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녹차의 맛보다는, 그 잎이 자라온 계절과 누군가의 손끝에서 머금은 정성을 떠올리며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익어가는 것과 심어야 할 것이 한자리에 머무는 이 계절, 나는 무엇을 거두고 무엇을 새로 심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삶에서도 익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하루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진 마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가족과의 눈빛, 자주 싸우지만 끝내 등을 돌리지 않는 오래된 인연들, 때론 고생 끝에 마주한 고요, 억지로 버티다 보니 스며든 여유…. 이 모든 것들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거둬들여야 할 것은 미련과 후회입니다. 붙잡고 있어도 달라지지 않는 일들을 놓아주는 지혜도 필요하겠지요. 이루지 못한 선택을 곱씹고 자책하기보다는 그 시간 속에서 내가 감당했던 마음만은 소중히 간직한 채,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 지혜 말이지요.
그리고 늦게나마 새로 심어보고 싶은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무런 계획 없이 카페에 앉아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하루, 매일 같은 동네만 걷던 내가 조금 먼 도시로 혼자 떠나는 여행, 한참을 멈췄던 일기장을 다시 펼쳐 마음을 적어 보는 일, 혹은 용기 내어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대화를 나눠보는 것. 그리고 한때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 몫은 아니겠지’ 하고 접어 두었던 소설 쓰기 같은 것들.
하상매거진 독자분들은 이 계절에 어떤 것을 거두고 무엇을 심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 말하지 못했던 진심, 잊은 줄 알았던 그리움 같은 것들을
다시 꺼내어 마주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햇살 아래 반짝이는 찻잎들처럼, 여러분의 일상에도 생기 가득한 초여름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출처: 시각장애인을 위한 월간문화교양지 하상매거진 2025년 6월호 (통권 제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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