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만나고 싶었습니다.
‘나는 꿈을 코딩합니다’의 저자 서인호 씨를 만나다!
기획 및 취재 최연신(하상매거진 인터뷰어)
서인호(29세) 씨는 전맹 시각장애인 개발자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외국계 기업에 입사해 현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시력을 잃은 뒤에도 배움과 도전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길을 만들어왔다. 지난해에는 그 여정을 담은 책 <나는 꿈을 코딩합니다>를 펴냈다.
이 책은 시력을 잃은 어린 시절부터 점자와 소리로 세상을 다시 배우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성장기이자 실용서다. 단순한 자전적 에세이를 넘어, 장애를 마주한 개인의 현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짚어낸다. 입시, 교환학생, 취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실질적인 정보와 동기를 만날 수 있다.
“공부를 위한 자료는 많지만, 정작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라”는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연민이나 감동에 기대기보다, 삶의 방향을 스스로 고민해 온 한 사람의 태도를 담는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 기록은 우리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이번 달에는 서인호 씨를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질문들에 대해 들어봤다.
이야기 하나_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마주하다
2003년, 여덟 살의 서인호는 ‘보는 법’을 잃었다. 선천성 녹내장의 합병증으로 인한 망막박리, 그리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 원인이었다. 수술 전에도 시력은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병실 복도를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시야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수술실을 나온 순간부터,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TV에서 나오는 만화 소리로 시간을 가늠했어요. <유희왕>, <탑블레이드> 같은 만화를 듣다 보면 지금이 몇 시쯤인지 알 수 있었거든요.”
시계를 볼 수 없었던 그는 텔레비전 속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의 흐름을 감지했다. 시각이라는 중심 감각을 잃은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낯설고 막막했다. 하지만 그는 귀로, 몸으로, 그리고 상상으로 세계를 다시 짜맞춰 나갔다. 떨어지는 물건의 소리로 상황을 유추하고, 손끝의 감촉으로 사물의 형태를 그려나갔다. 보는 것이 당연하던 세상에서, 이제는 ‘다른 방식의 인식’을 배워야 했다.
실명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인호 씨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실명 판정을 받았을 때, 부모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어느 날 갑자기 ‘시각장애인 자녀의 부모’가 된다는 건, 감정의 파도만큼이나 실질적인 공백이 컸다. 특수학교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고, 장애인을 접해본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냥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책 읽어 주기.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던 동화책부터 동물도감, 역사책, 학습지에 이르기까지, 읽고 녹음하고, 때로는 점자를 직접 배워 손수 점자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형이 읽던 책을 점자로 바꾸는 일이었다. 당시 맹학교 도서관에는 점자 동화책이 많지 않았고, 있는 책들도 유아용이거나 초등학생 수준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고전문학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그냥, 형이 공부하던 걸 저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그 책을 점자로 바꾸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엄마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인호 씨를 매일 경기도 시흥에서 서울 종로의 맹학교까지 차로 등하교시켰다. 하루 편도 한 시간. 그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또 학교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엄마는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며 점자 공부를 했다. 그렇게 ‘점자 제작자’로서의 엄마가 탄생했다.
인호 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세로셈법을 배우던 순간이다. 수식을 가로에서 세로로 바꾸는 개념은 시각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점자라는 매체로는 접근이 어렵고, 엄마가 설명하기도 힘든 개념이었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인호야, 엄마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처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엄마는 그냥 점자책만 만들어줄게. 모르는 건 선생님한테 물어봐.’ 그렇게 말했어요.”
그날 이후, 엄마는 가르치는 사람에서 다시 만드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하루에 몇 페이지씩 읽고, 몇 문제씩 풀라는 기준은 있었지만, 실제로 다 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믿어주었고, 아이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주었다.
“어릴 때 그 습관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 시절, 그 시기의 가정 교육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우리 엄마는 그 시간을 정말 밀도 있게 저와 함께 보냈고, 중학교 이후에는 오히려 깔끔하게 손을 떼셨죠. 할 수 있는 걸 하신 거예요.”
많은 부모가 장애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아이를 특수학교 기숙사에만 맡기고 거리를 두기도 한다. 실제로 맹학교에서 그렇게 가족과 점점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인호 씨는 깨달았다.
“사실 저희 엄마도 그러고 싶었을 수도 있어요. 외면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겠죠.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끝까지 ‘자식으로서’ 키우려 했어요.”
엄마는 단지 보호자가 아니었다. 정보 접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교육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점자 제작자가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서자 엄마는 자연스레 그 역할을 내려놓았다. 책의 분량도 많아졌고, 내용도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쌓인 독서 습관과 자율 학습의 리듬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인호 씨를 지탱해 주었다.
이야기 둘_비장애 사회에 들어선 첫걸음
서인호 씨는 시각장애인으로서 특수학교인 맹학교를 졸업하고, 비장애인이 주류인 대학이라는 낯선 세계로 들어섰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6학번. 스스로 말하길, 이는 단순한 진학이 아닌 ‘세상이 바뀐’ 순간이었다. 그에게 대학은 환경, 사람, 그리고 일상이 완전히 전환되는 새로운 우주였다.
처음 대학교에 입학하던 시기, 그는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할까 말까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맹학교 시절부터 외부 활동 경험은 있었지만, 이제는 단발성 만남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가 이어지는 대학 생활이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참가 신청서를 작성하며,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밝히고 인사를 먼저 못 하니 먼저 말을 걸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돌아온 학과 학생회의 반응은 따뜻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점을 미리 준비해 두면 좋을지 묻는 연락에 그는 고마움을 느꼈고, 행사의 책임자에게 미리 사정을 알리는 것이 앞으로의 생활에 필요하다는 걸 직감했다.
신촌역에서 신입생들과 점심을 함께한 뒤 캠퍼스로 이동한 그날, 서인호 씨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하철역 입구에서 흰 지팡이를 들고 서 있겠다고 친구들에게 알려두었다. 그 다섯 명의 동기들은 훗날 “그날이 처음으로 시각장애인과 점심을 먹고, 안내 보행을 했던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그는 혼자 눈을 감고, 모두가 눈을 뜬 세상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나 비장애인 동기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피시방, 농구, 축구 등 그들에게 익숙한 놀이는 서인호 씨에게 불가능하거나 제약이 컸다. 술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술 게임조차, 눈으로 상대를 지목하는 방식은 어려웠다. 그는 게임 규칙을 변형해 이름을 외치게 하거나, 청각 중심으로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재창조했다. 누군가는 어색해했고, 누군가는 함께 방법을 찾아주었다. 처음엔 “너랑 나오면 같이 할 게 없어”라는 말이 상처가 되었지만, 결국 그는 ‘어떻게든 함께 놀 수 있는 법’을 고민하고, 만들어가며 적응해 갔다.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연애 또한 그에게는 높은 벽이었다. 고3 여름, 대외 활동에서 만난 첫사랑은 비장애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들었고, 그녀는 서인호 씨에게 직접 점자를 찍은 편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점자지를 구하지 못해 메모지를 마우스패드에 올리고 볼펜으로 눌러가며 만든 편지. 그는 감동했고, 실명한 이후 처음으로 손글씨 연습을 시작해 답장을 썼다. 그 관계를 계기로 그는 100일 동안 독하게 공부했고,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100일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큼 절실했던 시간. 하지만 연애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의 언니가 전화를 바꿔달라며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그는 훗날 다른 시각장애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연애 단계부터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는 일이 흔하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처음으로 그를 ‘장애인’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봐 준 이였기에, 그는 지금도 그녀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학업의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컴퓨터공학 복수 전공에 도전했다. 처음엔 단순한 관심이었다. 졸업 필수 과목인 ‘컴퓨팅 사고력’ 수업에서 파이썬을 접한 후, “내가 개발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마우스 클릭 위주의 GUI 기반 개발 환경은 큰 장애물이었다. 그는 조교와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았고, 스크린리더와 키보드를 병행해 코딩을 배웠다. 그 결과, 300명 중 1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며 OCR 기술로 책을 읽고, 내비게이션 앱으로 여행을 다니며, 기술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체감했다. “내가 직접 개발자가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복수전공 과정은 고되었다. 리포트를 제출하면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인문학과 달리, 컴퓨터공학과의 과제는 코드가 실행되지 않으면 0점. 시각 중심의 교재, 수식, 그래프 등은 대체하기 어려웠고, 교수들 중 다수는 시각장애 학생을 처음 만난 이들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낙제를 겪고, 백지 시험지도 제출했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간다”는 결심으로 주요 과목을 이수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졸업 학점을 채웠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그는 취업 시장을 미리 경험하고자 이력서를 써보기 시작했다. 미국 교환학생, 복수전공, 오픽 IH 등 자신의 스펙을 정리하며 “어떤 산업군에서, 어떤 직무가 나와 맞을까”를 고민했다. 그는 결국 공공분야, 문화콘텐츠, IT 세 영역에 관심을 뒀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IT 서비스에 가장 큰 끌림을 느꼈다. 특히 “시각장애인 사용자의 불편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외국계 기업 입사라는 도전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가능성’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믿었다. 누군가는 “될 놈 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는 안 되는 현실 속에서도 되는 길을 끊임없이 찾았다. 서인호 씨는 시혜가 아닌, 공존의 언어로 세상을 설득해가는 법을 대학에서 배웠다.
이야기 셋_미국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본 열 달
서인호 씨는 학창 시절부터 해외 경험에 대한 갈망이 컸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외교관을 꿈꾸며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그는, 운 좋게도 미국 국무부가 지원하는 글로벌 교환학생 프로그램(UGRAD)에 선발되어 서던인디애나대학교에서 열 달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경험했다.
그 여정의 시작은 낯선 공항에서의 긴장과 불확실함으로부터였다. 외국 항공사의 기내에서 장애인을 위한 사전 안내가 생략된 채 탑승하게 되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익숙지 않았던 그는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환승 공항에서 길을 헤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첫 비행은 곧, 미국 생활이 가져다줄 수많은 가능성과 충돌의 전조였다.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서인호 씨를 찾아온 것은 교수도, 학과도 아닌 ‘장애학생지원센터’였다. 수업 방식에 맞는 보조를 먼저 제안하고, 필요한 기술과 서비스를 학교 측에서 능동적으로 마련해주는 모습에 그는 "내가 공부하기 위해 따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권리임을 실감했다"고 회상한다. 어떤 교수는 판서를 대신해 발표용 스크린에 워드 문서를 직접 타이핑해주고, 수업이 끝난 뒤 그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방식으로 그의 학습을 도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필요한 방식이라면, 그 방식이 곧 정답입니다”라는 말은, 한국에서라면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교사의 태도였다.
하지만 미국은 그에게 무조건 친절하고 포용적인 사회만은 아니었다. 한 번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낯선 이들의 제안에 따라 나섰다가 금전 요구를 받으며 불안에 떨기도 했고, 도시에서 길을 헤매다 노숙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나의 장애를 ‘도와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관심으로도 보였어요. 그 냉정한 거리감이 오히려 나에게 자율성과 선택지를 부여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여행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시카고에서는 길거리 축제에 참여하고, 마이애미 살사 클럽에서 춤을 배우고, 라스베가스에서는 놀이공원과 카지노를 누비며 새로운 감각으로 도시를 경험했다. 특히 클럽에서 살사를 배울 당시, 누구도 그의 장애를 언급하거나 제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파트너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는 경험이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주었다.
보조공학기술 박람회(CSUN) 참석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다양한 장비와 보조기기를 접하며, 그는 “기술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국의 현실도 자각했다. “한국은 장애인을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복지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기술이 아닌 제도가 장애의 벽이 될 수 있다”고 냉정하게 짚는다.
서인호 씨는 ‘자립’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것’이 자립이라 믿었다면,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고,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자립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자신이 생활했던 학교에서 시각장애인 신입생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나로 인해 그들이 ‘준비된 사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남긴 가장 큰 발자국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자, 곧 다시 현실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공항에서는 그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무빙워크 대신 걸어서 이동하게 했고, 대중교통에서는 ‘앉히기 위한’ 선의를 가장한 신체 접촉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미국의 시스템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질문을 먼저 던지는 문화는 있었습니다. 나를 결정의 주체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서인호 씨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놀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같이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살아가고 싶은 방식이 장애로 인해 막히지 않을 수 있는 사회. 그 가능성은 시스템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그의 이야기는 ‘장애인 차별이 없는 사회’에 대한 환상이 아닌,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완벽한 사회는 없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회는 가능하다는 것. 그가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계속해서 경험하고 깨달아가는 이야기다.
이야기 넷_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상을 코딩하다
시각장애인 개발자 서인호 씨의 취업 여정은 단순한 고용 문제를 넘어, 사회의 통념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대학 4학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한 그는 다양한 직무를 탐색한 끝에 소프트웨어 개발을 자신의 진로로 정했다. 현직자들의 조언을 참고해 우선 외국계 기업을 목표로 삼고, 해외 지사가 있는 한국 기업과 국내 기업 순으로 지원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사 담당자들과 마주했지만, 그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안 보이는데 어떻게 코딩을 해요?”라는 질문은 가장 흔하면서도 뿌리 깊은 의심이었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은 채용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말로 설득하던 시도는 곧 멈췄다. 그는 알았다. 편견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이후부터는 노트북을 꺼내 자리에서 즉석으로 구구단 프로그램이라도 직접 코딩해 보여줬다. 그렇게 증명해도 여전히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설득하지 않았다.
“답을 미리 정해놓은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요. 그런 곳에 합격하더라도 오래 다니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2020년, 대면 수업과 오프라인 채용 전형이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그는 오히려 유리한 환경을 맞았다. 도서관이나 스터디카페에서 매일 여덟 시간 이상을 혼자 코딩에 몰두했고, 알고리즘 문제를 풀면서 실력을 다졌다. 동시에 끊임없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메일 제목만 봐도 탈락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탈락 이유를 쉽게 장애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내가 비장애인이었다면 붙었을까? 장애 때문이라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일단 내 부족부터 돌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2년이라는 마지노선을 정했다. 그 안에 되지 않으면 이민도 고려하겠다고. 실제로 캐나다 이민 컨설팅도 받아봤지만, 그전에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다짐이 더 컸다. 이 기간 중 그는 한 외국계 기업에 세 번째 도전 만에 합격했다. 첫 번째는 채용 설명회에서, 두 번째는 정식 지원에서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면접 과정을 준비하면서 회사로부터 받은 ‘합리적 배려’였다. 면접 시 필요한 사항을 미리 요청하라는 안내 문구에 그는 놀랐다.
“우리는 당신이 최대한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 문장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입사 이후에도 적응의 여정은 계속됐다. 회사에서 혼자 일할 수 있도록 점자 표식이 사무실 곳곳에 붙기 시작했고, 구내식당에는 유도블록이 설치됐다. 식사 시간에는 피크 타임을 피해 조용히 이용하며 도움을 받는 방식을 선택했다.
“회의실 못 찾아가는 짐덩어리 팀원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회사라는 공간에 자신을 적응시켜갔다. 디지털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린리더로 사내 메신저와 문서를 읽고, 회의 자료를 따라가며 동시에 노트까지 작성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부족한 기능은 익히고, 불편한 시스템은 담당자에게 개선을 요청하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텍스트 기반의 시각화 도구 ‘Graphviz’를 활용해 코드 구조를 설명하고, 협업을 위한 소통 방식을 스스로 설계했다.
“결국 중요한 건 문제 해결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에요. 그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요구되는 역량이죠.”
그러나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인 동호회 가입이나 자기계발 활동에서도 거절당하는 경험을 겪으며 그는 ‘형평성’이란 단어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문하게 됐다. 스스로 열정이 충분한 분야라도, 사회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은 냉정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대신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 안에서 더 나은 방식을 찾는다. 때로는 그가 만든 길 위를 후배들이 걸어올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가며 나아간다.
“누구나 실력대로 보상받는 세상이어야 해요. 장애인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공급자의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질문하고 도전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성과로 증명하고, 변화로 응답하는 길. 그 길 위에 서 있는 서인호 씨의 이야기는 묻는다. 우리 사회는 과연, ‘다름’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야기 다섯_서인호가 꿈꾸는 다음 가능성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그래서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어요.”
사적인 바람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곧 말의 방향을 틀었다. 개인적인 목표 너머, 공동체를 향한 고민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맹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또 많은 분이 손을 내밀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가진 능력으로 무엇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자주 생각해요.”
그의 목소리에는 막연한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상이 담겨 있다. 요즘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게임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오래 품어온 아이디어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은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자리, 교육, 복지 같은 '필수적인 담론'은 반복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왜 항상 시혜적인 시선에서만 이야기될까요? 이들에게도 공부할 권리를 줘야 한다,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이 수십 년째 반복돼요. 근데 그 담론 너머로 가지 않으니까,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는 소비 주체로서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감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재미’와 ‘문화’를 누릴 권리,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실상 한국의 시각장애인 커뮤니티는 과거 90년대 수준의 게임에 머물러 있으며, 즐길거리 대부분은 여전히 ‘무료’여야 한다는 관념에 묶여 있다.
“돈을 벌 수 있게는 됐어요. 그런데 돈을 쓸 곳이 없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돈을 재미있게 쓸 곳이 없어요.”
그가 게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단지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즐기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사회적 자립의 기반을 만든다고 그는 믿는다. 그렇게 게임은 시혜의 대상이 아닌, 주체적인 문화 소비자로서 시각장애인을 상상하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어 자신이 개발자가 된 이유 중 하나도 ‘접근성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서였다고 털어놓는다. 새로운 버전의 앱이 출시될 때마다 기존에 되던 화면 읽기 기능이 무력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고객센터를 통해 이런 문제를 알리는 건 비효율적이고 종종 무시당한다.
“내가 개발자가 되면, 적어도 그런 문제를 다루는 실무자들과 직접 대화할 기회는 생길 테니까요. 실제로 지금은 네이버, 카카오 같은 데서 일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 연결을 통해 브릿지 역할을 해보고 싶은 거죠.”
그는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놓은 건 없다고 스스로 낮춰 말하지만, 이미 여러 방향으로 물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커뮤니티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마저도 쉽지만은 않다.
“연락을 잘 안 주세요. 저를 잘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이 말을 농담처럼 내뱉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바람이 있었다. 함께하고 싶다는, 기여하고 싶다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서인호 씨는 여전히 생각 중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그 첫 번째는 ‘재미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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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각장애인을 위한 월간문화교양지 하상매거진 2025년 7‧8월호(통권 제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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