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건너편 4층에 살던 시절. 아마 일곱 살 무렵이었을 거다. 나는 한 소녀와 친해졌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처음이 특별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어디에서 처음 만났는지, 어떻게 말을 트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을 뒤적이다 보면 모래바람이 인다. 기억의 사막 한가운데서 이미 모래알이 되어 버린 일들이다. 쥐어 보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몇 알은 여전히 손바닥에 남아 있다.
손바닥 위에 남은 몇 알의 모래를 바라본다. 회색빛 모래가 서서히 햇빛을 받는다. 어느새 모래는 따뜻해져 금빛 놀이터의 모래로 변한다. 나는 그 모래를 쥐고 있었다. 여름의 빛 속에서, 나는 다시 일곱 살이다.
놀이터에서 홀로 모래성을 만들고 무너뜨리다 보면, 어느새 소녀가 다가왔다. 소녀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우리는 잘 맞았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종종 소녀의 집으로 갔다.
소녀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그 집은 내가 알던 집과 달랐다. 방이 없었고 우리 집 거실보다 더 좁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방의 공기가 축축했고 퀘퀘한 냄새가 코끝에 남았다. 그 냄새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자주 그곳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잡일을 하기 위해 집을 자주 비웠다. 그래서 내 집보다도 더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그즈음 놀이터에서 다른 친구가 생겼다. 나는 습관적으로 더 재미있는 게 있다며 놀이터에서 노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와 밖에서 만나 같이 갈 때도 있었고, 예고 없이 들이닥쳤을 때도 있었다. 익숙함은 무례를 낳았다. 천진함은 그 사실을 가렸다. 그날의 우리에게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울었고, 비겁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도망쳤다.
그녀와의 관계는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녀를 다시 봤을 때 예전처럼 지낼 수 없었다. 그녀가 보여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렸던 나의 손바닥은 크지 않았다. 기억은 모래처럼 오래 쥐려 할수록 흩어졌다. 그래서 그녀가 이사 간다고 말했는지, 아니면 말없이 떠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할머니와 조용히 떠났다. 겨울이 되었고 따뜻했던 모래는 차가워졌다. 손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던 모래는 다시 회색빛으로 변한다.
스무 해가 넘게 지났다. 중국집 간판은 여전했다. 다만 놀이터의 모래는 그녀처럼 말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집은 창고가 되었다. 나도 그 세월 아래에서 조금씩 닳아갔다. 바위가 바람을 맞아 모래가 되듯 마음은 서서히 부서졌다.
그녀의 집처럼 내 속도 잡동사니만 가득한 창고가 되었다. 아무리 비워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아 곪아갔다. 그러자 내 무의식이 먼저 움직였다. 쌓인 짐들을 꿈에서라도 치워 보려는 듯, 나는 매일 꿈으로 출근하게 됐다.
꿈에서 나는 항상 무언가에 쫓겼다. 압박감에 숨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런 꿈을 하루에 세 개, 많게는 여덟 개까지 꾸었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지나가듯 상담을 권유했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그 약은 아침의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오전을 버렸다는 후회가 꿈속에서 내 목을 졸랐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부터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톺아보고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무너졌던 나를 한 줌씩 쌓아 올렸다. 무의식에도 진심이 통했는지, 악몽의 빈도가 점점 줄었다.
숨이 좀 트이자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되찾은 시간들이 어느새 길이 되어 나를 이끌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배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른이 넘었지만 수능을 다시 보기로 했다.
결심이 자리 잡자 긴장이 풀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해가 기울어 있었다. 메모 한 줄을 보태고 상담 기록을 덮자 숨이 잦아들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뜨니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너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나는 어리둥절했다.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만난 얼굴들을 훑어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미안해. 말도 없이 이사 가서.”
그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밖에 모르던 내가, 그녀의 얼굴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스쳤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네가 하늘이구나. 시험 꼭 봐야지.”
그는 나의 근황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이상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가 웃자 내 안의 오래된 그림자가 따라 웃었다. 모든 게 낯설게 따뜻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에게 한발 다가서서 말했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빛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나마 뒤늦게 사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수많은 꿈들은 결국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