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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이 Apr 20. 2022

아이들은 부모의 꿈

 '글을 써야겠다.'


 한참 동안을 머릿속에서만 떠돌던 생각을 천천히 끄집어냈다. 요즘의 이 들쑥날쑥 한 감정선이 도저히 정리가 되질 않아서였다. 지나온 나의 날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흐릿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휴무날엔 아내가 일을 하러 나가니 3살 배기 딸과 하루 종일을 보낸다. 이렇게 가장이 되어 삶을 가족에게 쏟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이 채워져 간다. 온전한 나의 시간은 이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무지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면 꿈이 바뀐 것도 그랬던 탓이다.


 최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무렵부터 요리를 했다. 처음엔 웨딩홀에서, 그리고 점차 길거리 식당에서. 단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점 내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왕 칼을 뽑은 거 제대로 된 요리라도

해보자 싶어서 군대를 전역한 후 호주로 떠났다. 처음엔 워킹홀리데이로, 중간에는 그 유명하다는 프랑스 요리학교로 진학까지 했다. 별이 몇 개니 모자가 몇 개니 하는 그런 세계적인 무대에서도 일을 해봤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오직 성공이라는 미래만을 그리면서 살았다. 그만큼 꿈도 비전도 다른 이들에게 꿀리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아토가 이제 막 생길 무렵 내가 운영하던 사업체는 레스토랑이었다. 신사동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양식당이었는데  나름 열심히 커리어를 쌓아왔던 터라

주변의 도움에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하는 행운까지 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데 현실적인 상황들을 많이 고려하지 못했던 나는 점점 커지는 지출에 대해 전혀 무감각했었고, 사업이 처음이라 미숙했던 부분들 중에서도 언제까지고 잘될 거란 헛된 믿음이 아주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미래는 생각치도 않고 펑펑 써가며 사업을 운영했다. 2년 정도가 지나자 '코로나'라는 자연재해가 세계를 강타했다. 저녁장사가 주였던 그 사업은 바이러스의 여파를 크게 받아 사업 자체를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가족의 밥줄은 지켜야 했고 그로 인해 동업자에게 가게를 넘기며 결국 일반 회사로의 입사를 결심했다.


 여기서부터 큰 내적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어쩌면 원치 않게 급급히 들어온 회사에서 나에게 정말 익숙했던 필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처음부터 굴뚝같았고, 사실 회사생활이 안정적이긴 했지만 늘 뭔가 숨통이 조이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조금만 더 자라고 아내가 다시 커리어를 쌓을 수 있게 됐을 때 난 다시 내 길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꾹 참고 지냈다.


 그렇게 회사를 1년 정도 다니며, 그 필드에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주변 셰프 동료들을 조금은 부러워하며, 다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오겠지 마음속에 다지며, 드디어 기회를 보고 이제는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둘째가 내려온 것이다.


 늘 아이가 둘 정도는 있었으면 싶었다. 외동으로 자라면서 내가 느꼈던 그 큰 외로움들을 내 아이에게 되물려주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산은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가 진짜 원하는 방향을 난 존중키로 했다. 본인도 그렇게 아이가 생기며 끊기는 커리어와 다시 회복해야 되는 몸이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둘째 소식을 가지고 마주 앉은 아내는 조금 벙벙해 보였다. 우리가 만든 생명이지만 정말 신기했던 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선 노력해도 몇 년째 안 생기고 심지어 시험관으로 만들려 하는 분들도 계신데, 우린 어떻게.. 이런 감사한 일이 다 생기다니.


 일단 이 상황을 우리가 어떤식으로 받아들이고 계획해야 할지에 대해 아내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처음엔 나도 정말 당황하고 큰 실수를 범할뻔하기 까지 했지만, 조금 생각을 더 해보자 한 뒤 며칠이 지나서 다시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다시 차분하게 해결책을 찾았다. 결국엔 이 소중한 생명은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는게 결론이었다. 우리는 어른이고 무엇보다 부모이며, 우리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서로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시 한번 각오했다.


"그래 우리 열심히 키워보자! 그까짓 내 인생 계획 좀 미뤄지면 어때 다시 맞춰 짜면 되지!"


"응. 우리 진짜 더 힘들어 질건 분명하지만 각오하고 반드시 행복하게 키우자. 우리 둘이 으쌰 으쌰 힘 합치면 다 이겨낼 수 있어. 서로 믿고 힘내자."


 진짜 가족이라는 게 다시 한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끝까지 잡고 있었던 나 혼자의 꿈은 그 순간 완전하게 우리의 꿈으로 바뀌게 되었고 우리의 꿈은 곧 아이들이 올바르게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크게 하는 것 그 자체가 된 것이다.


 모든 초점이 아이들에게 맞춰지게 되자 많은 생각들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조금만 버티면 다시 혼자 이런저런 것들도 할 수 있겠지 하던 게 이제 이런 건 이렇게 같이하고 저런 건 또 저렇게 같이해야겠구나 라고 묶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사를 생각할 때도 아이들 어린이집은 어디로 보낼지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는 또 어디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들이 생기기 전과는 확연하게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집을 워낙 깔끔하게 쓰고 싶었던 나는 아이들의 물품으로 가득 채워질 수밖에 없는 집을 더 이상 크게 신경도 안 쓰게 되었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따듯한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이로 인해 다른 소규모의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요즘 아주 다방면에서 부업으로 운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일명 'N 잡러'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명한 셰프니 뭐니 품격있는 어느 한 직업을 열망하던 꿈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러 수입의 파이프라인을 늘리는 쪽을 택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힘들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등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건 다 곧 세상에 나올 두 번째 아이와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고 있는 첫 번째 아이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그들이 큰 역경 없이 웃으며 지내게 하는 것. 아빠가 없는 나의 어린 시절 그토록 바라던 그런 것들을 내 아이들에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내 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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