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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이 Apr 26. 2022

걸음이 느린 아이

그리고 함께 걷는 게 서툰 초보 아빠

 얼마 전에 아이와 처음 동네 한 바퀴를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사실 한 바퀴를 채 다 걷지 못하고는 두 팔을 번쩍 들며 '안아~' 하고 나를 멈춰 세웠다. 그래도 이 작은 순간은 또 내 마음을 울렸다.


 나는 다리가 짧은 내 콤플렉스에 비해 걸음이 꽤나 빠른 편에 속했다. 내 어린 기억 속에 함께 걷던 외할머니로부터 내려온 성격 급한 집안 내력인지도 모른다. 그저 앞만 보고 살아오느라 제대로 된 연애 한번 진득이 못하고 지내온 터라, 사실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 걷는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른손잡이인 내가 마치 손을 다쳐 왼손을 쓰는 격이랄까?


 아이가 걷기 시작한 후로는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첫걸음을 떼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배우게 됐다. 누워있던 아기가 어느새 몸을 옆으로 뒤집고, 목을 조금 편하게 가누게 되면 슬슬 기기 시작한다. 무릎을 일으켜 세워 기어 다니다가 어느새 무언가를 잡고 또 일어서고 그러다가 쿵, 중심을 못 잡고 또 쿵, 아슬아슬 줄타기 마냥 불안하게 걷던 모습에 온갖 신경이 곤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충격을 완화해줄 바닥 매트와 무릎 보호대등이 그나마 내 식은땀을 닦아줬다. (우리나라는 카펫 문화가 발달한 외국에 비해 딱딱한 바닥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성장판에 자주 무리가 생겨 평균적으로 키나 체구가 작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또래들보다 활발했던 내가 다리가 짧아졌나 보다. 많은 제품이 발달한 요즘엔 워낙 아이들 체형이 서구적으로 많이 바뀌고 있으니깐, 이라며 합리화를 해본다.)  


 그렇게 집안에서 혹독한 걷기 연습을 무려 1년여를 하던 아이가 드디어 유모차도 없이 혼자 힘으로 동네 (거의)한 바퀴를 걸은 것이다. 차가 지나간다 싶으면 얼른 옆으로 피해 잠시 쉬고는, 다시 나에게 "손~" 하며 조막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꼭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보며 나도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보폭을 맞춰 주었다. 이렇게나 옆에 걷는 누군가에게 집중하며 함께 걸은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말이 동네 한 바퀴지 어른들의 걸음으로도 족히 100보 200보는 될 것 같은 그 거리가 이 아이에겐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이었을까.


 아이는 머지않아 손을 잡지 않고도 100보 200보는 거뜬히 걷기 시작할 것이다. 비록 오늘 나와 함께 땅만 보며 천천히, 그리고 아주 열심히 걸었던 그 작은 순간들은 아이에게 기억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보폭을 맞출 여유도 없었던 나에겐 수도 없이 바쁘게 걸어온 많은 날들보다 이 짧은 순간이, 그 따뜻했던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이, 느릿느릿 걸었던 아이의 그 작은 발걸음이, 시무룩 해진 채 다 걷지도 못하고 지쳐 안으라며 번쩍 들던 두 팔이 아주 오래도록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같이 건강하게 걸어줘서, 자라줘서 고마워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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