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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Sep 24. 2023

방황

찰나의 시차 동안 써내려간 스케치

그는 자신의 방 안에서도 끝없이 방황했다. 무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십번씩 현관문을 들락거렸으나, 그렇다고 딱히 어디 멀리를 꿈꾼다거나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걷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능한 상태는 '도중'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산책길 또한 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구부러지고, 협소하며, 외딴 골목길 뿐이었으므로. 그의 집 옆에 난 천변을 걷는다면 원하는 만큼 멀리 갈 수도 있을 터였다. 그 천변은 곧장 한강으로 이어지고–심지어 만나거나 분기하는 길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한강은 또다시 수많은 도시로 연결되며,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으므로. 문제는, 그 천변 자체가 한강으로만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도로가에서 한층 내려와, 단조로운 풍경으로만 그를 반긴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한번은 그 천변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걸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먼 길을 걷는 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곤 (자신이 이토록 예고 없이, 불시에 사라지는 걸 용서해달라는 편지를 아주 길고도 장황하게 쓴 것과) 외딴 삼각주 너머로 밤하늘보다도 새까만 새들이 끊임없이 반대편의 어둠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모습 뿐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한쪽 어둠의 끝이 곧장 반대편 어둠의 끝, 삼각주 너머의 공간과 연결되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리라. 서로 한없이 멀어지는 공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위치한 어둠의 끝을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고차원의 축선 상에서 이어붙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처한 시공간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이미지의 향연. 끝없이 반복되는 장면의 순환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체가 사실은 이러한 장면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가닿게 했다. 단지 각자가 인식하는 세계의 너비와 부피만 달라질 뿐, 형식은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끝없는 순환의 한 요소에 불과할 거라는 의심. 그 장면을 마주한 순간 그는 자신의 길고 장황한 편지를 시작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 순환의 이미지가 사라진 지금, 그는 그 편지에 무어라 썼던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그 편지의 대상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것 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한때였고,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미 한없이 낡은 것만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간이나,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존재처럼. 기억, 사물의 이미지, 신념, 그런 것들만이.

이순간, 그는 실패한 사랑을 떠올린다. 지나간 것만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그는 결코 그것에 성공하지 못하리라. 누군가가 너는 무엇을 사랑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는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일순간 혼란에 빠져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고.

그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말하는 순간 그것은 너무도 오래되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더욱이 현재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침묵과 회피에 대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는 말로 그를 질책하며. 그는 그러한 질책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었다. 고독은 상존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누군가의 말처럼 고독은 오류이므로. 인간 자체가 고독한데, 어떻게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로울 수 있겠냐고. 그와 있어도 외롭다는 말은, 단지 고독이라는 근원적인 상태를 망각하기 위해 그를 만난다는 뜻으로 여겨졌으며, 그것은 존재의 눈을 가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느끼는지.

그것은 공존의 인식만으로도 충분했다. 타인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물질이 시공간을 다소간 왜곡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왜곡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스스로의 시공간을 훼손하고 침해하는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그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랑 바깥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러므로 그는 불가피한 질문을 받는 순간마다 한 번의 기회를 잃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사랑을 설명해주기를 요구받는 매 순간 그는 사랑의 부분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장이 성공적으로 이어진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가 사랑을 조금씩 잃어간다면. 사랑에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말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가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써버리고 만다면,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만 남아버리게 된다면, 그때 그가 상대방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의 얼굴뿐이리라.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누군가를 위한 설명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설명만으로는 사랑의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자기애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이거나, 아가페일 뿐이다. 그러한 사랑의 대상에는 특정한 타인이 아니라 불특정한 대상이 필요할 뿐이므로, 그는 그 사랑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랑에 대해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렇게도 꺼리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말했다. 모든 사물은 거울이기도 하다고.

그러므로 거울면이 만들어내는 어쩔 수 없는 시차는 언어의 원천이고, 언어는 오직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시간의 잔여분으로서 시차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도했을 테지만 그것에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단지 그 시차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혹은, 자화상에 충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거울에 의해 발생하는 시차와 이미지를 동시에 설명하는 사람을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언어는 마치 양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관측의 행위처럼 행해지는 순간 곧장 되돌릴 수 없어지고,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뿐인 것이다.

다만 그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순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아지는 순간. 그에게 세상은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는 것들로 가득할 때 그는 표독스러워지고, 맹목적이어지고, 방황한다. 자신이 가장 친숙한 공간 속에 있는 순간 마저도. 언어의 대상을 도통 찾을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그는 표류의 순간을 기다린다. 표류를 만들어 낼 조류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 때란 언제인가. 책을 마구잡이로 읽고,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고, 사람과 끝없이 이야기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그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써뒀던 글을 읽는다. 혹은 썼다고 생각했으나 잃어버린 글들을 찾아 헤맨다. 인간의 기억을 대체해주는 수많은 수단들을 뒤진다. 아이클라우드며, 하드드라이브며, 외장하드며, 글을 올릴 수 있는 사이트며, 수명이 다해버린 휴대폰을 충전해가며. 이미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무언가를 한없이 그리워한다. 그래, 이미 말했듯이, 그리워한다는 건 무언가 잘못됐다는 말이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느끼는 잘못된 감정이며, 그가 점점 망가져가고 있다는 환상(혹은 증상)의 외적 발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이미 실패한 사랑, 혹은 너무 낡아버린 것들이다. 언어는 단지 시차만을 설명할 수 있으므로, 언어로 설명되는 것들은 무조건적으로 한없이 예전의 것이기에.

그는 그 시차를 좇는다. 그와 거울 사이의 무한한 공간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도 언젠가는 그것을 알았을 때가 있었겠으나, 단지 지금은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가장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가장 깊은 낙하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도 채 30분이 안되는 공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무언가를 챙겼다가, 무언가를 놓고왔다는 감각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고, 이내 무언가 결심한듯 멀리 떠나려는 자세로 바리바리 챙겨 떠나지만, 곧장 탈 것에 실려 길을 거스르고... 그리하여 그는 가장 좁은 낙하를 시작한다. 시차의 영역으로, 모든 것이 한없이 낡아버린 사물들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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