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다가 밤을 꼴딱 넘겨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어제였고, 저는 다섯시가 훌쩍 넘어서야 잠에 들었죠. 그 아무 의미도 없는, 단지 어떤 단편적인 사건들의 아주 조그마한 파편의 이미지들, 때로는 심지어 거짓말과 조작으로만 이루어진 그 영상을 왜 하염없이 보고 있었을까요. 그게 열두시가 조금 넘은 때였으니 거의 300분, 그러니까 300개의 영상을 보았다는 얘기겠죠. 정보 전달을 가장한 혐오와 차별은 당연하고, 단순한 우스갯소리도 못 될 영상들. 그러나 가끔 흥미로운 영상들도 스쳐 지나갑니다. 조회수가 한 자리수에 불과한 어느 외딴 지역의, 의미라는 일정한 구조로부터 탈구된 듯한 영상, 인물도 (1분짜리에 불과한) 서사도 제목도 달려있지 않은 기이한 영상이야말로 그 중에서 가장 제 흥미를 끄는 영상입니다.
이건 저의 속성일까요, 매체의 속성일까요, 혹은 매체로부터 기인한 생화학적 반응의 속성일까요. 물론 그 모든 것의 얽힘이겠지만, 저는 원한다면 무한히 이어지는 횡스크롤의 연속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그렇다면 이 무모하고 무한하고 무의미하고 동시에 고독한 (그래, 고독하다는 말은 이 행위에 꾀나 어울리는 수사입니다.) 반복 동작은 제 속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걸까요. 기술은 인간의 확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체는 우리 정신의 연장선이며 그리하여 어디서도 선명하게 구별을 해낼 수 없는 이 얽힘 속에서 저는 결국 제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고, 분명히 책임질 수 있고, 분명히 후회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오늘 제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 아닙니다.
연유도 모른채 기분이 착잡해지곤 하는 날은 왠지 말투가 공손해집니다. 그건 저를 둘러싼 모든 감정의 원인을 저로부터 귀결할 수 밖에 없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이렇게 공손한 말투로, 스스로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그리하여 존중하는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을 땐,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도통 이런 기분을 해소할 방법을 못 찾겠더군요. 스스로가 너무도 못나 보이고 안쓰럽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때에는 말이죠.
타인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 제가 말했던가요. 물론 아직 그 진술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문장은 너무나도 양면적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사람들은 쇼윈도 안에 진열된 상품 위로 겹쳐지는 자신을 본다고 헀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거울의 또다른 기능이기도 합니다. 거울은 자신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들도 들춰낸다는 것. 그러므로 어딘가에서 거울을 발견한다는 것은 늘 상존하는 위협을 가집니다. 자아를 발견하는 동시에 이미지화된 자아를 다른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게 되니까요. 물론 이것이 늘 위협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 스스로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질 때. 거울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이미지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앞선 질문. 유튜브 숏츠를 300개를 넘길 동안 눈을 떼지 못한 저의 행위는 "정말로" 저의 속성일까요?
뒤따른 질문. 제가 갖고 누리는 지금의 이미지는 저의 속성일까요? 제 선택의 귀결일까요? 어디까지 제가 선택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사회가 부과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흐름의 맥을 천천히 따라 거슬러 올라가봅니다. 그 맥을 끊어내고 흐름을 통제할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말이죠. 흐름의 자연적인 골짜기나 웅덩이를 찾지 못한다면 종국에 저는 다시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할 테죠. 그리고 제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보를 댑니다. 아, 제 발치에서 물이 차오르는군요. 저는 이 보를 열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빠져 죽기 직전까지 가만히,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다그치고 몰아세우듯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죽겠다 싶을 때, 그때에야 저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찾아냅니다. 찾아낸다기보다 찾아야만 하죠. 그리하여 그 해결책은 늘 차악이 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모두 끝이 나고 맙니다. 집중 호우가 강타하지 않는다면 결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게 어찌 제 맘대로 되던 적이 있었나요. 우리는 무엇이든 늘 쏟아지는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요.
그러나 이런 행동 방식을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 방식이 나를 타인으로부터 구분해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제 목적은 언어로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통 이해되지 않더라도 제 언어를 발명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 그리하여 세상에 내가 살아있음을, 왔음을, 계속해서 그럴 것임을 기입하기 위해서. 빌렘 플루서가 말하듯, 글쓰기라는 몸짓은 본래 종이 위에 휘갈겨쓰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표면에 날카로운 도구로 무언가를 새기는 집요하고도 고생스런 몸짓이므로 말이죠.
그래서 저는 늘 제가 생각하는 방식을 고수해왔습니다. 누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군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다만 이런 방식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에는 제가 쌓아온 모든 신념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필사의 위기의식이 찾아옵니다. 그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저는 제가 의식하며 살아온 (길지는 않은) 삶의 절반을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아집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어찌보면 처절하게도 지켜온 삶의 절반이 날아가는 경험. 그 상실은 켜켜이 쌓인 시간을 경험으로 치부하게 되는 수준이 아니라, 신념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심연의 등장, 그리하여 일순간 발생하는 시간의 실종일 것일 테니까요.
그 위기를 오늘 느낀 것입니다. 저를 아껴주고 위해주는 사람의 성취가 이렇게도 싫을까요. 심지어 저도 그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말이죠. 저는 어쩌면 매번 (어떤 종류이든지) 사랑에 대해 휘갈기고 울부짖지만 그건 사회의 유연함으로도 통용될 수 없을 만큼 찌그러지고 뒤틀린 형태, 그리하여 모두에게 불쾌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는 아닐까요. 저도 도통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그 사람의 거울 위에 비친 제 모습은 정말로 제 것이 아닌 듯한 느낌, 그리하여 거울 속에서 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 배치되어있는 다른 수많은 이미지들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마리오네뜨를 발견한 느낌, 그리하여 거울의 표면 위 사물들 속에 포근히 자리하는 제가 아니라 그 모든 사물들을 착취하고 갈취하고 소유하고 내던지고 짓밟고 내던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를 발견한 느낌입니다. 마리오네뜨는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없으므로, 자신에게 부재하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의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저 거울 속에 있는, 마리오네뜨의 형상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중첩되는 사물과 상품의 이미지에 눈이 멀어버린,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저 존재는... 정말로 제가 가진 속성일까요?
저는 오늘도 고백할 것이 너무 많은 나머지 좀처럼 타래를 풀어낼 단초를 찾지 못해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또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 먼지만 삼키게 될 운명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