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의 급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이름, 인물 등은 실제사건과 관계 없습니다.
채윤아, 3학년부터 회장 뽑는 거 알지?
반에서 대표 뽑는 거 말이야.
우리 때는 반장이라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왜 회장이라 그러나 몰라,
전교회장이랑 햇갈리게.
너 그거 나갈 거야?
아침 시리얼을 먹고 있는 채윤에게 현주가 물었다.
당연하지. 엄마, 나 화장하고 싶어.
어릴 때부터 예쁜 옷만 입히고, 좋은 곳만 데리고 다니며 키웠다. 그런 채윤에게 주인공이란 마땅히 자신의 자리이다.
그래 좋아.
우리 채윤이가 당연히 회장 해야지.
엄마가 채윤이 회장 선거 때 입을 예
쁜 원피스도 준비해놨으니까
이제 같이 공약만 준비하면 되겠다.
채윤과 엄마의 치밀한 준비 덕에 채윤은 무난하게 8표를 받아 회장에 당선됐다. 현주는 채윤을 위해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곳에 공주 모양 케익에 ‘회장 당선 축하’ 문구를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
우리 채윤이 축하해.
엄마는 채윤이가 당연히 될 줄 알았어.
부회장은 누구 됐어?
아린이랑 준서.
아, 아린이..아린이는 성격도 좀 내성적인 거 같더구만 출마했나보네?
티아라를 쓰고 케익 위의 촛불을 불던 채윤이가 대답했다.
응, 아린이 예뻐서 인기 많아.
지 엄마 닮아 사연 있어 보이는 첫사랑 상. 현주는 그런 아린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 눈엔 네가 훨씬 예뻐. 그러니까 네가 회장 됐지. 3반 애들이 보는 눈은 있네.
근데 준서? 병설 유치원 나오고 학원도 안 다닌다던 준서?
응, 근데 준서 이제 학원 다닌 다는 거 같던데?
' 애 방치한다고 생각했던 집인데..? 채윤이 회장하는데 일 안생기려면 어떤 앤가 내가 좀 알아봐야겠네.'
현주는 자신의 딸의 앞 길에 조금의 어려움도 생기길 바라지 않는다. 선행을 시키는 것도 미리 배워놓아야 학교에서 진도 나갈 때 채윤이가 당황하지 않고 잘 해내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디서건 자신감있고 당당한 내 딸,
너무 자랑스럽다.
현주는 케익을 잘라 접시에 옮겨 담아 채윤에게 건넸다.
채윤아, 케익은 반조각만 먹자.
선생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현주님 그러면 집에 가서라도 고관절은 마저 꼭 풀어주세요.
네.
현주는 룰루레몬 요가복 위에 경량 패딩을 걸쳤다.
3월 하순, 아직은 쌀쌀한 날씨다.
로저 비비에 스니커즈를 신고 피코탄 백을 손목에 걸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습관적으로 켠 인스타그램에 오란 샌들 피드가 떴다.
이미 재작년부터 많이들 신어서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에는 골드색으로 하나 장만할까 싶어 판매자에게 디엠을 보낸다.
사진만큼 실제로도
정품이랑 똑같나요?
가격은 얼마에요?
20만원입니다.
기다고 있었다는 듯 즉각적인 답변이 왔다.
여름 한 철 끌고 다닐 슬리퍼에 100만원은 너무 아깝다. 진짜 에르메스 백과 함께 신고 다니면 잘 만든 짝퉁은 티가 안난다.
스타벅스 유리창 너머에 지영이 보인다.
무언가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또 뭔 교육서겠지.'
워킹맘으로 민재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지영의 노력이 때로는 눈물겨워 보일 지경이다.
민재엄마.
현주가 부르자 지영이 고개를 들었다.
지영은 언제나 인사보다 먼저 현주의 옷차림을 훑는다. 오늘은 현주의 보석 스니커즈에서 시선이 멈췄다. 지영은 자기 신발을 감추려는 듯 무릎을 구부려 의자 밑에서 발목을 꼬았다. 그렇게 하니까 시선이 더 간다.
' 오피스룩 파는 인쇼에서 산 4만원쯤 하는 짝퉁 신발이겠지.'
짝퉁에도 급이 있다.
채윤 엄마, 오랜만이에요.
현주의 시선은 지영의 책에 머물렀다.
‘초3보다 중요한 학년은 없습니다’
저런 교육서는 읽어 봐야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전국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개론적인 이야기를 알아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애를 전국 평균으로 키우겠다는 건가.
저런 책에선 학군지에선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진짜 정보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애초에 학교 선생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수업 시간에 집중하고 교과서 열심히 보라는 다 아는 이야기. 저기에서 각 동네 학원 정보를 알려 주기를 하나. 안 그래도 교육 트렌드가 얼마나 빨리 바뀌는데 출판된 종이책으로 보고 있는 건 이미 뒤처진 정보다.
아직까지 저런 책을 못 놓고 있다니 아까까지 안쓰러웠던 지영이 지금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저런 지영이기에 오늘 이야기가 쉽게 풀릴 거 같다.
이제 3학년인데 민재 수학 학원
어떻게 할 거예요?
현주가 먼저 운을 띄웠다.
지금 보내고 있는 S학원은 초등 1, 2 정도까지가 꽃이라고 해서 더 보내긴 좀 성에 안 차고 4학년 때 H 학원 보내고 싶긴 한데 그러려면 또 3학년에 엄청 잘해놔야 합격할 거 같아서 안 그래도 고민이에요
역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대로다.
민재는 지금도 S 학원 프리미어 반 다니니까 그럼 수학꿈학원 원장반 넣어보는 거 어때요? 들어가기 힘들긴 하지만 민재야 뭐 워낙 잘하니까.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가 스토리텔링 수업으로 유명하긴 한데 사실 그 힉원 꽃은 H 원장 반 수업이거든요. H 원장 반 수업시간 안맞는 애들은 대치에서 여기까지 역으로 라이딩하기도 해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 갈 시간이다.
아니면 옆 동네에 J 학원이 이 동네에서 오래해서 잔뼈가 굵은 곳이에요.
저기 길 건너에 P 중학교도
전교 1등에서 4등까지 다 그 학원 다닌대요. 원래 초등 고학년 이상만 받아주는 곳인데
초3도 잘하는 애들 모아오면 원장 직강으로 특별히 탑 반 꾸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4명만 모아오라고 하던데
민재 혹시 생각 있어요?
민재 잘한다는 이야기 하나면 지영의 입꼬리는 어김없이 올라간다. 사람이 이렇게 다루기 쉬워서야.
지금 민재가 S 학원을 워낙 즐겁게 다니고 있긴 해서 제가 좀 고민해 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튕겨..?'
현주는 지영의 반응이 마뜩잖았다. 아까부터 지영이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휘저어 유리잔에 얼음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그 순간 유달리 거슬렸다.
원래 3학년 정도 되면 대형학원
하나 다니면서 다들 소형학원이나 과외
추가로 더 붙여서 해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던 애들도 많고요.
J 학원 같은 데는 제 소개 아니면
민재 엄마가 혼자 알아보고
팀 짜서 넣기 힘드니까 이번 기회 잡아요.
한 번에 승낙하지 않은 게 짜증은 나지만 그동안 늘 현주가 하자는 대로 해왔던 터라 곧 긍정적인 답변이 올 것을 예상했다.
그러면 원장님한테 일주일 안에 답을 드려야 되니까 그 안에 답 줘요. 저도 민재 안 한다고 하면 다른 멤버 구해야 해서요.
네, 연락드릴게요.
제안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지영이 현주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영이 현주를 마음 깊이 친구라고 여기거나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 것 또한 알고 있다. 그저 워킹맘이니까 미처 다 알 수 없는 교육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런 지영에게 현주는 상당한 그것을 제공한다. 당장 오늘 J 학원 같은 곳만 해도 인터넷에 찾으면 정보가 나오지 않는 곳이다.
학군지를 돌아가게 하는 건 겉보기에는 대형학원들의 셔틀 행렬이지만 사실 이런 소규모 학원들이 그 틈을 탄탄히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지영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에 현주는 채윤의 학원비를 내지 않는 것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찾고 제공해주는 대가이다.
참, 채윤이 회장 됐다면서요. 너무 축하해요. 우리 민재도 나가보고 싶다고 나가더니만
대차게 떨어지고 온 거 있죠?
부회장은 다 모르는 애들이더라고요.
민재도 출마했지만 3표를 받았다고 채윤에게 전해 들었다.
애 회장 만드는 것도 엄마가 다 주변 관계 만들고 바탕을 다져줘야 하는 건데 그냥 회사 다니면서 나한테 정보만 쏙쏙 빼가느라 다른 엄마들이나 애들이랑 관계도 안 다져 놓으니 당연한 결과 아닌가.
이래놓고 워킹맘들은 겉돈다고 한탄한다.
가끔 보면 지영은 공부 머리만 좋았던 건지 인간관계 돌아가는 쪽으로는 아둔해 보일 때가 많다.
부회장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뽑는데 남자는 준서, 여자는 아린이가 됐어요.
그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이에요?
그게 이제 와 궁금한가. 선거 전에 미리 궁금해했어야지.
매번 반 배치표가 나오면 일일히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켜보며 파악했던 현주다.
아린이는 채윤이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M 영유 나오고 지금 C 수학학원에서
채윤이랑 같은 반이에요.
엄마도 뭐 무난하고요.
아린맘과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늘 그렇듯 제일 중요한 부분은 생략하고 알려준다.
준서..는 좀.. 특이해요.
준서는 그동안 전혀 신경 쓴 적이 없던 존재다. 그냥 동네에 맨날 땀 뻘뻘 흘리면서 공을 차고 있던 애, 관심 밖이었다. 그저 우리 채윤이가 저런 애와 얽히지 않길 바랐을 뿐.
우리 애들 다니는 초등학교에
병설 유치원 있죠?
거기 나왔어요.
여기는 다른 지역이랑은 달라서
병설보다 영유를 선호하니까
병설이 늘 자리가 남아돌거든요.
거기 누가 보내나 했더니만
준서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학원은 축구랑 태권도만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준서 누나도 있는데 누나도
학교 방과 후 교실만 잔뜩 보내고
그냥 학원은 안 보낸다나.
암튼 엄마가 좀 별종인 거 같아요.
애들을 좀 방치하는 느낌?!
엄마!
이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스타벅스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 아이들이 너나없이 모두 각자의 엄마를 찾아 학교 가방을 내려놓는다. 어느새 아이들 하원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채윤이의 번지 피지오 체험 클래스를 예약해 놓았다. 신나게 놀면 땀도 많이 흘리고 몸매도 예쁘게 잡아 준다고 해서 신청했다.
지영은 다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 아래 깔린 작음 얼음을 들어 입 속에 털어 넣고 와그작거렸다.
'경박스러워. 채윤이한테 나중에 저런 집안은 발도 못 붙이게 해야지.'
채윤 엄마, 요즘 그렇잖아도
문해력 때문에 난리라는데.
채윤이 어휘나 독해문제집 따로 안풀리세요?
늘 이런 식이다. 다른 엄마 이야기같은 거 하면서 공감을 좀 받아보고 싶어도 휘말리기 싫은 건지 듣는 둥 마는 둥 안끼고 있다가 자기가 궁금한 것만 툭 물어본다.
지금 하는 것도 바빠서
따로 풀리는 건 없고요.
저는 나중에 그냥
올가미 논술학원 같은데 보내려고요.
다른 엄마들 보니까 뿌초독같은 거
많이 풀리더라고요.
국어를 따로 안챙기고 있을 리가 없지만 왠지 말해주기 싫었다. 어쨌거나 본론은 다 이야기했으니 이제 일어서야겠다.
저 그럼 갈게요.
수학학원 어떻게 할지
최대한 빨리 연락 줘요.
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윤의 학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