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 근교 와인 산지에서 광합성하기
독일 여행의 꽃은 소도시 여행이라고들 할 정도로 독일에는 예쁘고 특색있는 소도시가 많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독일 소도시를 여행하는 트윗을 봐서 나도 여행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졌다.
에슬링엔(Esslingen am Neckar; 네카 강변 에슬링엔)은 슈투트가르트의 베드타운을 겸하고 있는 소도시로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유명한 와인 산지이다. 독일 와인은 우리나라에 수입이 많이 되지 않고 워낙 맥주로 유명한 독일이다보니 의외일 수 있지만 독일에서는 와인도 아주 많이 생산된다.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에서 에슬링엔에 가려면 우리나라의 무궁화호와 같은 RE 기차를 타면 9분밖에 안 걸리고 도시철도인 S반을 타면 20분 남짓 걸린다. 이렇게나 가까워서 슈투트가르트 주민들도 주말이면 여기에 와서 로컬 와이너리 투어를 하거나 피크닉을 하거나 예쁜 풍경 아래서 근사한 한 끼를 먹으며 분위기를 낸다. 게다가 겨울에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중세풍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서 나도 매년 독일인들의 손에 이끌려 갔다.
이날은 7월의 어느 날인 한여름이었는데, 독일의 카페에는 에어컨도 없는 주제에 아이스커피도 팔지 않고 생과일주스조차 시원하지 않아서 땡볕에 쓰러지지 않으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다행히도(?) 내가 집을 나설 때쯤인 아침 열 시에는 기온이 27°c밖에 되지 않았다.
카페가 너무 예쁘기도 했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서 커피를 주문했다. 사실 땡볕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건 탈수를 부르는 지름길이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앉아 책도 좀 읽고 싶었는데, 풍경을 감상하느라 정작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거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으면 이런 멋진 풍경을 보며 뭐라도 뚝딱 만들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서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하염없이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감상했다. 뼛속깊이 대도시 러버라 그래도 거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유리창 너머 언덕에 가득 펼쳐진 포도밭을 직접 보러 가 보기로 했다. 에슬링엔이 유명한 와인 산지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눈을 두는 곳마다 포도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좀 많이 놀라웠다.
저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소도시 시청 공무원이겠지! 아무리 독일에서 공무원이 인기 없는 직업이고 대학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아 고급 기술을 요하지 않는 직업에 속한다 해도 저런 멋진 건물에서 일하는 것이라면 지원해보고 싶을 것 같다. 겨울이면 이 일대 모두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변신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에슬링엔 성(Burg Esslingen)인데 예전에는 적을 방어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성 안에는 오래 전에 사용되었던 대포도 있다!
에슬링엔을 찍은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가까이서 볼 때도 예쁜 건물들이었는데 이렇게 살짝 높은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보니 예쁘게 빚어 둔 도자기 집 모형 같아서 정말 예뻤다. 게다가 붉은 지붕이 있는 도시가 녹색의 포도밭에 감싸인 모습이 좋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답기는 했는데 이 때 기온이 34도까지 올라서 땀이 비오듯 흘렀고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언덕을 40분이나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예쁜 풍경도 실컷 봤고 좋은 사진도 많이 건졌으니 그만 포기하고 내려갈지 몇번이나 고민했다. 하지만 정상을 밟았다는 만족감을 위해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열심히 올라가니 드디어 문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없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즈넉하고 버려진 성터를 돌아보며 지었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싯구 하나 정도 읊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범죄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에 내가 여기서 납치당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독일과 프랑스에 사는 친구들 몇몇에게 혹시 내가 성에서 내려왔다거나 집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으면 납치당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이나 영사관에 연락 좀 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위 사진의 길을 따라서 걷다 보니 사람들이 나와서 안심했다. 날씨 앱을 켜 보니 그새 기온이 36°c까지 올라 있었다. 벤치에 앉아 예쁜 풍경을 보며 가져온 책을 읽고 싶었지만 목도 너무 말랐던 데다 너무 더워서 그만 내려오기로 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너무 집중을 해서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는데 책을 읽는 사이 피크닉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사람도 거의 남지 않은 성에서 범죄의 타겟이 될까봐 무섭기도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마침 하산하는 프랑스인 그룹이 보였는데 그 사람들이 내가 올라왔던 언덕이 아닌 계단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다. 그런데 계단이 정말 무섭게 생겨서 이 길로 내려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 프랑스 그룹의 말마따나 이 계단에는 최소한 지붕이라도 있다는 점을 들어 계단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중세에 사람 여럿이 명을 달리했을 것 같이 생겼다.
저 출구의 마지막 단을 내딛었을 때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범죄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은 맞는지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뒤에서 누가 날 밀어버릴까봐 조금 불안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범죄 드라마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서 무사히 잘 내려왔고 앞에 가던 프랑스 그룹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에슬링엔답게 소도시임에도 무려 스타벅스가 있었다! 이전에 살던 대학도시 튀빙엔에도 없던 스타벅스인데 튀빙엔보다 인구도 적은 에슬링엔에는 떡하니 있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이 스타벅스 덕에 에어컨 바람을 쐬며 시원한 것을 마시고 쾌적하게 여행을 끝마칠 수 있어 좋았다.
소도시 여행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행복해졌다. 역시 사진을 많이 남겨오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