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brosia Sep 03. 2020

데이빗 포스터 : 오프 더 레코드

팝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넷플릭스 추천 음악 다큐


9월의 첫날이다.

아마도 오늘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올 노래는 지풍화 형님들 (Earth, Wind and Fire)의 “September” 아닐까?

Earth, Wind and Fire 하면 “September” 와 “Boogie Wonderland”, “Let’s groove” 같이 덩실덩실 절로 춤이 나오는 흥겨운 디스코가 먼저 떠오르지만, 세련된 멜로디와 감미로운 코러스가 돋보이는 “After the love has gone”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지풍화 밴드의 명곡이다, (1979년 빌보드 2위와 그래미 ‘The Best R&B song’ 수상)


• 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하고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After the love has gone”.
• ‘에불바디 니져리를 탐어웨이~’라고 공책에 한국말로 적어가며 따라 불렀던,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Chicago의 명곡 “Hard to say I’m sorry
• 전 세계 24개국에서 동시 1위를 차지했던 어머어마한 불후의 명곡 휘트니 휴스턴의  다이아~ “I will always love you”.
• 셀린 디온의 가공할만한 고음과 파워풀한 보컬을 세상에 알려준 “All by myself
• 앳된 얼굴의 성악 전공생 조쉬 그로반을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려준 노래 “You raise me up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아무 연관성 없어 보이는 위의 노래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래미상 47번 후보에 16번 수상, 전 세계적으로 음반 5억 장 이상 판매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갖고 있는 슈퍼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의 손에서 만들어진 곡들이라는 점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정좌를 하고 티브이를 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귀가 행복해지는 음악들과 반가운 팝스타들을 다시 보는 즐거움이 가득한 1시간 40분이었다.


예고편만 봐도 전율 최소 5번!!



데이빗 포스터는 1949년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는데 어린 데이빗이 “그 건반은 E야”라고 외쳤고, 아이의 절대음감과 음악적 재능을 눈치챈 부모님은 음악가가 될 신의 계시라며 기뻐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피아노를 시작하여 12살에는 University of Washington의 음악원에서 호른, 색소폰,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많은 악기를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훗날 데이빗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The the Beatles came along
and changed my life.


13살에 처음 듣게 된 ‘비틀스’는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뮤지션이 되겠다는 아들에게 부모님은 노후자금 1700달러를 투자해 건반과 앰프를 사주셨고, 16살의 데이빗은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으로 떠났다.
딥 퍼플, 핑크 플로이드같이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활동하던 런던에서 클래식만 공부했던 데이빗은 성공의 단 꿈은 맛보지 못했지만, 재즈와 락, R&B 같은 다양한 음악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를 전폭적으로 믿어주었던 아버지가 이듬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1974년 LA로 음악활동의 무대를 옮긴 뒤 비로소 그의 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흥행 중이었던 <록키 호러 픽쳐 쇼>에 피아니스트로 들어간 데이빗은 곧 총괄 음악감독이 되어 유명 뮤지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릴 적 우상이었던 존 레넌도 이때 만나 곧잘 어울렸다고 한다.
존 레넌, 조 카커 같은 다른 뮤지션들은 합주 중간에 종종 술이나 마약을 하러 나가지만, 데이빗은 잠도 안 자고 약도 안 하며 밤새 피아노만 쳤다는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세션 뮤지션으로 입지를 쌓아가던 어느 날, 한 녹음실에서 데이빗은 헐리웃의 거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만난다.
그녀가 녹음하고 있던 노래의 시작 부분이 영 맘에 안 든다며 녹음을 중단하고 나가려는 찰나, 데이빗이 즉석에서 편곡한 멜로디를 연주하고 바브라가 그를 주목했다.
‘오케스트라를 쓰지 않고 신시사이저만 이용해서 이 세상 음악이 아닌 것 같은 소리를 만들어달라’는 바브라의 요청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운드의 “Somewhere”가 탄생한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의 일화



그 외에도 다수의 아티스트들과의 앨범 작업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일화는 <Chicago>와의 작업이었다.

오랜 침체기에 빠졌던 브라스락 밴드 Chicago는 승승장구하던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를 구원투수로 영입하여 16집 앨범을 부탁한다.
본인 스스로 일컫길 ‘젊고 거만하고 자심 감에 가득 찬’ 33세의 데이빗은 노장들이 준비한 데모 테이프를 모두 다 별로라고 거절하고, 보컬 피터 세트라와 함께 발라드 중심으로 전두 지휘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Hard to say I’m sorry” “You’re the inspiration” 같은 명곡들이 수록된 대박 앨범이 탄생했지만, 멤버들은 트레이드 마크였던 브라스 연주를 비롯해 밴드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분노하며 결국 팀 내 분열이 일어났다.
데이빗으로서는 밴드를 빌보드 차트에 복귀시키기 위해 문제 해결사의 역할을 한 것인데, 모두의 갈등이 고조되고 피터 세트라의 탈퇴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는 듯.
(하지만 지금까지도 Chicago는 그 히트곡들로 투어를 다니고 있긴 하다.)
그 작업 이후 38년이나 지났건만 피터와 다른 멤버 간의 관계는 여전히 서먹한지 인터뷰도 따로 하고, 데이빗 역시 불편한 감정을 살짝 엿보이는 모습이 흥미롭다.

또한 1992년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히트와 차트 신기록을 세었던 <보디가드>의 주제가 “I will always love you” 역시 미다스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다.
제작사는 <보디가드>의 편집본을 확인하고 이대로 가다간 스릴러가 되겠다며 로맨스와 음악을 더 넣어서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
데이빗 포스터는 제작사의 요구를 받아 ‘영화의 본질을 보여주고 배우들의 감정과 호흡을 살려주는 음악’을 만들고자 하고, 이는 데이빗과 휘트니 휴스턴 일생일대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아름다운 휘트니 휴스턴과 데이빗 포스터


아직도 극장에서 처음 <보디가드>를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휘트니의 목소리가 ‘If I~~ should stay~~” 하고 아카펠라로 흐르고, 작별의 인사 후 비행기에 탑승했던 그녀가 돌연 Stop!이라 외친다.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달려 나간 그녀가 케빈 코스트너에게 안기고 곧이어 키스하는 두 사람.
그리고 숨을 확 멎게 하는 두둥! 사운드와 함께 온 극장에 ‘And I~~ will  always love you’가 울려 퍼졌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어린 마음에도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다큐를 통해  돌리 파튼의 컨트리송 원곡을 들어보니, 저 노래를 가져다가 어쩜 이렇게 매끈한 R&B 노래로 변모시켰나 새삼 데이빗의 능력에 놀라게 되었다.




데이빗 포스터의 또 다른 재능은 바로 숨겨져 있는 원석을 발굴해 반짝반짝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으로 가공해내는 능력이다.
캐나다 퀘벡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셀린 디온을 만난 데이빗은 ‘셀린이 노래하기 시작하자 영화에서 갑자기 어둠이 내려앉고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녀만 내 눈에 보였다’라고 회상한다.
결국 당시까지 불어 노래만 하던 무명의 여가수는 당대 최고 프로듀서와 함께 인생 첫 영어 앨범을 내게 된다.

셀린 디온과의 만남


현재 캐나다의 국보가 된 마이클 부블레 역시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다가 데이빗 포스터의 눈에 들어 발굴된 경우였다. 그에게서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클래식한 재즈싱어의 잠재력을 발견한 데이빗은 25세 청년에게 함께 LA로 가자고 청한다.


1999년 그래미 시상식의 리허설에서 유럽 공항에서 발이 묶인 안드레아 보첼리를 대신하여 셀린 디온과 듀엣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당시 17세의 성악가 지망생 조쉬 그로반의 경우도 비슷하다.
목소리만 듣고 조쉬 그로반을 선택했던 데이빗 포스터는 지구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You raise me up”을 통해 그를 엄청난 스타덤에 올렸다.

가수 자신도 몰랐던 최상의 목소리를 끌어내 주는 프로듀서.
완벽한 비전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고, 세밀하게 모든 음을 채워내는 음악가.
음악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잘 알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소리를 프로듀스 하는 사람.
단순한 히트송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을 탄생시키는 창조자.





위의 모습들만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데이빗의 뛰어난 재능과 음악적 성공과는 별개로 그의 사생활은 혀를 쯧쯧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하제일 금사빠였던 그는 결혼만 5번에 배다른 딸이 5명이다.
휴일도 없이 일에만 매진하는 워커홀릭에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반사적으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도망자 타입의 남자.
아버지의 야망과 무심함에 상처 받았던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가슴 아팠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아이들과 살기 위해 떠나는 아버지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먹고사는 걸 보면, 역시 능력이 있어야 자식도 찾아오는가 싶기도 하고,
어린 시절 소홀했던 자식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나이 들어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딱히 낯설진 않았다.

19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우리가 들어본 팝송들의 큰 지분을 담당하고 있는 데이빗 포스터.
사실 그의 음악은 팝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많은 영화음악과 심지어 올림픽 주제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 든다.
다큐가 끝나고 스크롤이 올라가면서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을 위해 데이빗이 작곡한 ‘Winter game’ 이 흘러나왔다.


첫 소절만 들어도 아! 이 노래!! 하게될 음악


알게 모르게 우리가 듣고 자란 수많은 연주곡의 작곡가이자 연주자, 한 시대를 자신의 음악으로 가득 채운 프로듀서.
무엇보다 70세를 넘어서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에 도전하며 열정적인 삶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