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며...
시카고에 사는 남편과 나는 한 달에 한번 ‘diversity dinner’라는 모임에 나간다.
그 모임은 나이도, 인종도, 성별도 상관없다. 그저 생각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고, 인생을 나눈다.
지난달 모임에서 우리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No one has a grandfather in my hometown.” (내 고향에는 할아버지가 있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어.)
러시아 할머니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참 슬픈 이야기다.
동네의 모든 남자가 전쟁을 위해 징용되어 끌려갔고,
간혹 젊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기도 했지만, 나이 많은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4-5년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들은 수백 번 살인을 저질렀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정신이 피폐해져 갔고, 악몽을 꿨으며, 이상한 행동들(하루 종일 중얼중얼, 도리도리 같은)과 함께 쉽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온 가정은 돌아오지 못한 가정보다 훨씬 더 괴로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했다.
아빠를 한없이 기다려왔는데, 아빠가 돌아와서 더 불행한 아이들이라... 하...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래, 나도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많이 봤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미국 할머니 하시는 말씀. 미국도 같았다고.
그리고 이번엔 ‘아내이자 엄마'의 번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하루아침에 남편이 없어지자, 여자들은 공장에 나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꿋꿋하게 아이도 키워야 했으니,
‘엄마’들은 스스로 강해져야 했고 나아가 집안의 가장으로써 집안 대소사에 결정권을 갖게 되었단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남편들이 돌아오자 공장의 많은 일이 국가의 결정하에 다시 남자들에게 넘어갔고,
여자들은 다시 돈을 못 벌거나, 아무도 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찾아야 했단다.
그러다 보니 영향력이 작아지고, 가장 중요하게는 ‘결정권'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자주적이었던 사람에게 다시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라는 건 팔다리를 자른 것과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집안의 모든 결정을 하던 사람에게 ‘시키는 대로 해'라는 건, 주인에게 노예가 되라는 말과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남자와 여자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전쟁보다 더한 고통만 남은 그들.
참 슬픈 역사이다.
입장이 많이 바뀐 그들 사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집'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던 남자는 얼마나 집이 그리웠을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여자는 얼마나 ‘집'을 지키고 싶었을까?
돌아온 남편이 아무 데도 설자리가 없을 때 그래도 감싸주는 곳은 바로 집이다.
돌아온 남편이 꼴 보기가 싫어 떠나고 싶어도, 그 발걸음 잡아주는 것도 바로 집이다.
지금 미국은 코로나로 '자택격리'중이다.
3월에 자택격리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정부에서 1인당 $1200 재난보조금을 뿌리고, 모기지를 3달씩 유예해주어 사람들이 굶지는 않았다. 근데 그것이 4월을 지나 5월 중순이 되자, 대기업 소상공인 할 것 없이 줄줄이 해고에 들어갔다. 버젓이 재택근무라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중에도 무급 처리된 사람이 태반이다.
전쟁이 따로 있을까?
먹고살 수 없으면 전쟁 아닌가?
이제 미국사람들은 '집 지키기'를 해야 한다. 전쟁이 나면 내 한 몸 돌아갈 곳은 집 밖에 없으니...
월급이 불규칙한 사람에게는 모기지도 안 나오고, 렌트도 내주지 않는다.
해고된 사람에게는 모기지도 안 나오고, 렌트도 내주지 않는다.
신용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모기지도 안 나오고, 렌트도 내주지 않는다.
즉, 비 막아주는 지붕과 내 몸 누일 수 있는 따뜻한 바닥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터에 선 심정으로 이를 악 물어야 하는 시점이다.
크던 작던, 근사하던 낡았던, 도시에 있던 시골에 있던..
퇴근 후 전투복 같은 옷을 벗고, 소파에 깊게 몸을 뉘이고 쉴 수 있는 그 공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집'은 우리의 영원한 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