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는 9살, 14살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천국이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편의점에 데려가서 마치 재벌인 양 외쳐주면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한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몇 년에 한 번 보는 손녀들을 위해 항상 온갖 먹거리를 주문해 놓으신다.
약과, 식혜, 강정... 한국 맛을 모두 다 보여주고 싶으신지 여기저기 먹을게 눈에 들어온다.
친할머니 상황도 마찬가지.
그 유명한 한국 딸기부터 초코 식빵까지 마구 사다 놓으신다.
세상에 이런 천국이 있을까?
세상에 이런 사랑이 있을까?
아이들은 마음껏 사랑을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을 맛보신다.
그리고 나면...
오우...
남는 건...
쓰레기...
미국도 분리수거는 있다. 재활용과 일반쓰레기. 근데 그것은 내 선택이다.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미국에서 나는 비닐과 종이, 캔, 병 등은 재활용 통에 때려 넣고, 나머지는 일반쓰레기통에 넣는다.
음식쓰레기는 당연히 일반쓰레기통에 포함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 갈 때마다 쓰레기통 앞에서 멈칫, 바보가 된다.
한국에 가면 엄마에게 묻고 또 물어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고,
미국에 오면 약식으로 분리수거를 한다.
한국 가면 한국법을 따르고, 미국 오면 미국법을 따르고..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의 마음 따위 내게 없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듯, 눈앞에 쓰레기가 보이면 그저 치우면 그만이었다.
지구를 사랑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보다, 많이 버릴수록 내 삶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쓰레기 버리는 날이 제일 행복했었다.
그런데, 지난달 부부동반 모임으로 갔던 스테파니 할머니 댁에서 스피노자의 마음이 뭔지 내 나이 44살에 실감했다.
포트락(각자 음식을 준비해서 나눠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내가 맡은 것은 애피타이저.
백인 8명에 우리 부부 2명인 그 모임에 거부감 없을 메뉴로 내가 선택한 것은 군만두였다.
사이즈 커다랗고 고급져 보이는 일회용기를 꺼내어, 기름 빠지도록 키친타월을 넉넉히 깔고 군만두를 담아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와인 한잔 하며 밤늦게까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할머니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일회용기랑 일회용 포크를 설거지해서 돌려주시며 "상태가 너무 좋으니 몇 번이고 쓸 수 있겠어. 키친타월은 빨아봤는데, 기름이 져서 할 수 없이 버렸어."라고 하셨다.
뻘쭘했다.
그 후에 만남을 통해 여쭤보니 90세를 바라보는 스테파니 할머니는 '환경사랑가'셨다.
➣집에 놀러 가면 몇 번이고 물어보신다. 춥지 않냐고, 카디건 빌려주시겠다고. 뼈가 시릴 그 연세에도 집안 온도를 높이지 않으신다. 지구를 위해 1도라도 낮추신다.
➣손님이 오면 초를 켜시는 할머니는 성냥도 재사용하신다. 할머니의 초는 컵에 들어있어서 녹았다 굳는과정을 반복하며 여러 번 쓸 수 있지만, 컵의 밑바닥까지 거의 다 쓴 초는 긴 라이터나 긴 성냥을 필요로 한다. 할머니의 선택은 라이터가 아닌 성냥. 성냥상자 안에는 이미 황이 묻어있던 성냥의 머리 부분이 다 타고 없어진 막대기만 남아있었다. 그걸 버리지 않고 계시다가 거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컵 깊숙이에 있는 초에 가져다 대신다. 목이 긴 라이터 하나면 될 일인데, 그 귀찮은 과정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본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물건들로 생활이 가능하다면 새로운 물건은 사지 않는다고 하셨다.
➣Tea 한잔을 주셔도, 우유와 설탕, 비스킷 등 여러 용기가 나온다. 설거지가 힘들 연세시니 일회용 쓰시면 편할 텐데.. 일회용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 집엔 흔한 비닐봉지 하나 없다.
할머니는 환경운동가처럼 으쌰 으쌰 캠페인을 벌이고, 모금활동을 하는 분이 아니다.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 - 온도를 1도라도 낮추고, 필요 없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일회용을 쓰지 않는 것-로 지구사랑을 실천하시는 '환경사랑가'시다.
내가 90세라면, 나에게 좋은 것 나에게 편한 것을 더 원하지 않을까?
설거지하며 다리 허리가 쑤셔오는 상황에서도 후대를 위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드는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