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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Feb 21. 2021

에디터라는 이름의 함정

가장 최근 내 명함에는 에디터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명함을 반납하고 집에 돌아온 날 이후로 문제가 생겼다. 모니터의 흰 페이지가, 노트의 공백이 너무나 막막했고 크게만 느껴졌다. '일 말고 편하게 내 마음을 쏟아내야지'라며 신나게 카페에서 노트북을 열고는 한참을 커피만 마시다가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기 몇 줄 쓰기도 쓰기 힘든 건 내 몸이든 마음이든 고장이 나도 한참 난 것 같다는 생각에 문제의 원인을 찾으러 곰곰이 시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내 삶 속에 함께 하던 글쓰기


내게 최초의 글쓰기는 아마 많은 다른 이들처럼 일기였던 것 같다. 선생님께 검사를 받기 위해 매일 해야 하는 일. 초등학생에게 뭐 그리 매일 새로운 일이 일어날까마는 그 나이대에는 그 나이대의 고민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매일매일 소소한 고민과 설레는 일, 읽은 책에 대해 쓰곤 했다. 지금은 너무나 생경한 내 모습이지만, 노는 것보다 책이 좋았던 그 시절의 글에는 스위스 산골의 하이디나 초록 지붕 집에 사는 앤과 공감하며 공상하던 나의 어리지만, 결코 작지는 않던 세계가 담겨있다. 고백하건대 수학에 치여 공부를 못해도 항상 좋던 언어영역 성적부터 성인이 되어 글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기회 모두 이 시절의 꾸준한 글쓰기와 독서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입시 공부로 삶은 팍팍했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감성적이던 청소년기에 글쓰기는 끓어오르는 감성을 분출하는 도구였다. 또래보다 조숙한 척 도서관에서 빌려온 옛날 흑백 영화를 보거나 70년대 록 음악을 들으며 낭만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그 감성과 열정을 쏟아냈다. 그때 나의 글쓰기는 '수능이 끝나면 이런 문화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리라'는 현실과 타협한 혹은 미뤄둔 욕구를 꾹꾹 안전하게 담아놓는 보관함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간접 경험만 하던 책 밖에도 정말 재미있고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책과 글에 소비하던 시간은 현저히 줄었지만 반짝이는 경험들, 특히 여행 중의 일기는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강렬해 주변 소음과 냄새까지 그대로 진공 시켜 놓고 싶던 여행지에서의 메모는 언제 봐도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그래서 그 시절의 글에는 생생한 시간이 담겨 있다.


새로운 삶의 축복과 저주가 된 글쓰기


졸업 후 가볍게 썼던 한 편의 여행기가 여행잡지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그야말로 우연히 내 글에 대해 재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 발견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커리어를 변경하게 되는 삶의 터닝 포인트로 이어졌다.   


크게 인지하지 못했던 내 작은 재능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계기였지만, 취미가 업이 되면 따라오는 부산물도 함께 왔다. 과정보다는 정해진 시간 안에 꼭 나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결과물 생산에 집중해야 하는 압박감과 책임감.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길. 나는 그 스트레스마저도 일의 한 부분으로 즐겼고, 그 틀 안에서도 최대한 내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그 일에 보람까지 느꼈으니. 꼼꼼한 조사와 정보 체크를 하며 내 성격의 장점인 책임감을 발휘했고 일을 하며 누릴 수 있는 다채로운 경험에도 감사했다.


단지 정식으로 글을 배우거나 쓰지 않고 우연히 이 길에 들어섰다는 약간의 콤플렉스와 불안감, 빛나는 재능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니고 번뜩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감동을 주는 카피라이터도 아닌 그 어디라는 어중간함이라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상업적인 글에도 나의 색을 담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이 오롯이 나의 생산물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나의 손을 떠난 활자는 조각조각 편집되어 회사의 콘텐츠로 존재했지, 내 이름을 달고 나의 무엇으로 남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월급을 주는 도구가 된 글은 더는 그 자체로 내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고 퇴근 후 글쓰기, 극단적으로 말해서 '6시 이후에 돈을 받지 않고 하는 글쓰기'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내게 성인이 된 이후 글쓰기는 새로운 기회이자 저주였다.



글쓰기,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다시 와주길


시간을 돌려 찬찬히 보니 에디터라는 타이틀을 떼고 나서 글이 쓰이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히 보였다. 글은 잘 써야 하는 결과물로 존재했고, 목적 없이 완전치 못한 나 자신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이 너무나 어색해 깜빡이는 커서가 마냥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않은가. 나를 짓누르던 문제와 글쓰기가 즐겁던 시절의 나를 대면했으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된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초심으로 돌아가 날것의 글을 써내려가고 싶다. 단어 하나하나 생동감 있게 뛰어오르는, 부족하고 미숙해도 나라는 사람이 담겨 있고 내 생각이 글자로 형상화된 글. 다시 한번 글이 주는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공상으로 빠지게 해주는 그 설렘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글이여, 내게 다시 한번 그 풋풋한 모습으로 다시 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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