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 여행자의 합리화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
-생텍쥐페리
우주를 여행한 '어린 왕자'의 작가도 말했듯이 흔히들 여행의 즐거움과 여행 가방의 크기는 반비례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여행 고수들이 말하는 짐 가볍게 싸기' 같은 기사를 보면 민망할 정도로, 내 짐의 크기는 햇수를 거듭하며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나 같은 여행 맥시멀리스트는 진정한 여행을 못 즐긴다는 거야?'라는 반감이 삐죽삐죽 들어 나 같은 이들을 대신해 항변해보고자 한다.
인스타그래머블 하지 못했던 첫 배낭여행
보통 가볍게 짐 싸기는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하고 있다. 과 친구들과 함께한 나의 첫 해외여행 짐 싸기도 그와 같았다. 거의 한 달에 달하는 장기 여행의 목적지가 유럽이었으니 우리는 짐을 어떻게 쌀 것인지에 대해 꽤 고민했다. 심지어 유럽 7개국 일정이었으니 각기 다른 화폐와 날씨 등 고려할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선배들의 충고를 참고해 최대한 가볍게, 실용적으로 싸는 것을 목표로 했다(장기 유럽 여행자들은 심지어 입다가 버릴만한 옷을 가져가서 부피를 줄이라는 말도 했다!). 덕분에 내 배낭은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고 두루두루 입을 무난한 옷과 거기에 맞출 스포츠 샌들 등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비교적 가볍게 여행했으나, 지금 그때의 인물 사진을 다시 보지는 않는다. 요즘 인스타그램의 화보 같은 사진까지는 아니더라도 풍경을 망칠 정도로 궁상맞은 여행자의 흑역사가 박제되어있기 때문에.
첫 여행의 현타 이후 나의 가방 속은 점차 다채로워졌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옷과 그에 따른 신발과 가방, 노트북이나 DSLR 같은 전자기기, 책 등 하나하나 넣다 보니 가방의 크기나 보조 가방의 수는 늘어났다. 물론 큰 가방을 이고 다니다 보면 '짐의 무게는 전생의 업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도 있었다.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으면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며 남미 여행에 무리해서 가져간 삼각대와 저장매체는 아버지에게 빌려온 게 아니었다면 첫 주에 이미 버려졌을 정도로 내 어깨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며 기존의 '배낭여행'에 '출장'과 '휴가'라는 여행 타입이 추가되며 나의 여행 짐은 계속 늘어났다. 일 때문에 필요한 것들이라는 합리화도 가능했으니.
효율성만이 짐 싸기의 미덕일까?
큰 짐은 분명히 기동성을 떨어트리고 보관이나 비행기를 탈 때도 불리한 게 사실이기에 미니멀리스트처럼 여행하기에도 도전해보곤 했다. 여행지나 숙소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은 넣지 않고 만약의 경우도 고려하지 않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떠난 여행은 신체적으로는 편했다. 가뿐한 짐과 가벼운 발걸음.
그러나 몇 번의 시도 후에 다시 나는 큰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그 경험에서 내게는 뭐가 더 중요한지 무의식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는 것처럼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홀로 여행지를 걷다가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면 가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 펜과 수첩을 꺼내 끄적이고 싶고, 로컬들이 가는 살사 바를 만날 수도 있으니 살사 슈즈도 챙겨가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출장에서 갑자기 초대된 저녁 자리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내가 좋아하는 원피스와 구두를 갖추고 나가고 싶고, 평소에는 늦잠을 자더라도 좋은 피트니스 센터나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호텔에서는 꼭 일찍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운동하려고 한다. 배고픔을 못 견디는 사람이다 보니 문이 빨리 닫는 유럽 도시에 늦게 도착했을 때 먹을 비상 스낵도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결국 가방 안의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넣어 가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는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에 그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아쉬움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이게 있어서 너무 좋다'라는 기쁨이 신체적인 힘듦을 상쇄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짐을 싸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는지의 한 부분을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효율을 논할 거면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는 여행을 하는 것보다 저축하는 게 낫지 않은가? 라고 외치며 나는 맥시멀리스트의 짐 싸기를 고수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처럼 짐을 많이 꾸리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무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한쪽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여행 스타일과 목적을 알고 그에 따라 짐을 싸는 게 맞다는 이야기다. 나의 여행 스타일에는 생존 필수품만 싸는 것이 맞지 않았으므로 전체 짐을 줄일 수 없다면 대신에 지혜롭게 짐을 꾸리고 숙소를 찾기로 결심했다. 경험을 통해 여행의 만족감을 올려줄 것들로만 채우고, 많은 물건 중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필요에 따라 분류했고, 짐을 많이 이동할 필요 없이 가능하면 한곳에 오래 머무는 방식을 택했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굳이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고, 집처럼 생활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의 등장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큰 캐리어는 더 이상 내게 크게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캐리어 안에 물리적, 정신적으로 여유도 생겼다.
내가 효율적인 가벼운 가방보다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무거운 가방을 선택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자책하거나 내 방식을 포기하기보다는 나를 나로서 인정하고 그 안에서 더 좋은 방법을 찾으면 어떨까. 꼭 다른 사람의 기준에 날 재단하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내 안의 기준과 행복에 집중하자.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안다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게 꼭 여행 가방 싸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