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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Feb 28. 2021

불편함이 주는 새로운 기회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부비동염, 보통 축농증이라고 부르는 병을 갖게 된 이후부터일 것이다. 코 주위 얼굴뼈 속 빈 공간(부비동)에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고이는 질환인데, 비염처럼 흔하지만 코가 숨쉬기와 관련된 기관이라 일상생활을 참 고달프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코가 자주 막히고 콧물이 나오다 보니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입으로 숨을 쉬다 보니 치아에도 좋지 않았다. 주말마다 좋다는 이비인후과며 한의원은 참 지겹게도 돌아다녔다. 아직도 어머니는 이 얘기가 나오면 '네가 그걸로 고생만 안 했어도...'라고 괜스레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표하실 정도로, 항상 학급 임원과 1등을 도맡던 밝은 아이를 한때 꽤 위축되고 조용한 아이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질환. 수술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었지만 너무 어려서 성장이 어느 정도 완료되는 중 2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중 2가 되고 마침내 내 생애 첫 전신 마취와 입원 수술을 하고 부비동염과 이별을 고했다. 그 후 내가 만난 세상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존재하는지 몰랐기에 놓치고 있는지도 몰랐던 세상의 모든 냄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치 포토샵을 한 총천연색 사진을 보듯 냄새 입자들이 강렬하게 하나하나 다가왔다. 지금도 냄새에 민감한 덕분에 맛있는 음식은 누구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자칭 미식가지만, 한편 역한 냄새에는 남들보다 비위가 쉽게 상하기도 한다. 


거의 무에서 유가 된 후각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청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귀가 코와 연결된 기관인지라 염증이 심했을 때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귀가 멍한 순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은 날에는 작은 발소리에도 잠이 깰 정도로 청각이 예민해졌다. 1년 만에 걸려온 업무 전화에도 목소리로 누구인지 맞출 정도.  


내 감각이 비교적 예민하다고 느낀 후에 나와 비슷한 경우를 방송에서 만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중식 대가인 이연복 셰프와 여러 개의 식당을 운영했던 방송인 홍석천 모두 나와 같은 부비동염이 있었다고 한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안타깝게도 수술 후 부작용으로 후각을 잃게 되었다. 음식을 맛보는데 후각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큰 장애물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자 대신 미각이나 시각을 활용해 남들보다 더 맛을 잘 만들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저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발달되는 감각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발달시키고 더 날카롭게 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 관리와 연습이 뒷받침된 결과지만 말이다. 




장애: 심리적, 정신적, 지적, 인지적, 발달적 혹은 감각적으로 신체적 기능이나 구조에 문제가 있어, 활동을 하는 데 한계가 있거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지칭한다. 


나의 어릴 적 질환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장애'에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나 또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영향을 배제하고 얘기하면, 그 장애가 신체적으로는 이렇게 현재의 내 감각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이 감각들이 실제로 남들보다 발달된 것인지 아니면 남들은 항상 가지고 있던 것인데 내게는 없다가 주어져서 민감하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특화되고 비로소 경험하게 된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례를 보다 보니 장애가 꼭 나의 한계를 제한하는 시련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단어 그대로 풀자면 '-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영단어 disability(장애)도 따지면 특정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내가 가진 능력 전체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니까. 베토벤이 난청 때문에 피아니스트 대신 위대한 작곡가가 된 것도 그가 외부의 소리 대신 내면에 집중해 머릿속 음악을 악보에 옮겼기 때문 아닐까. 


내 부비동염의 경험을 베토벤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비약일지도 모르나, 인간이 장애를 만났을 때 그 한계가 주는 영향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장애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극복의 대상이나 결핍이 아닌 나만이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극복한다면 새로운 도약이 될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히 새로운 깨달음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장애에 함몰되거나 맞서지 않고 포용한다면 말이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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