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만드는 인생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취향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멜론 탑100이나 sg워너비의 음악을 듣는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 cj 감성 한국영화는 보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맛없는 것으로 배를 채우지는 않는다. 꼰대와 함께 일하느니 백수로 산다. 시끄럽고 번잡한 것은 질색이다.
누군가는 코웃음 칠 수 있는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천천히 쌓아 올려졌던 나의 취향은 어느샌가부터 점점 커져 내 인생을 퍼즐처럼 맞추기 시작했다. 딱히 내가 의도했던 것도 아닌데 얼떨결에 선택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내 인생을 조립했다. 이런 깨달음은 며칠 전 왔던 한통의 깜짝 전화로부터 왔다. 대기업에서 일을 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이 언니는 최근 회사에서 곤란한 입장에 처해져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런 때에 패기 넘치게 회사를 박차고 나갔던 내가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을 했던 것이다.
요즘 뭐하고 지내, 라는 무난한 물음에 응 그냥 마케팅. 하고 단조롭게 대답한 나는 수회기 너머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어머, 정말? 너 우리 회사 그만둘 때 마케팅하겠다고 나갔잖아! 유럽 일주하고 나서 마케팅할 거라고 나가더니 정말 하는구나.. 부러움과 놀라움이 담긴 반응에 나도 같이 놀라며,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난 생각이 안 나는데. 지금 언니가 말해줘서 알았어 라고 답했다.
어떤 회사냐는 물음에 별 대단한 마케팅은 아니야. 월급도 높진 않고.. 그런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좋아. 꼰대도 없고 집에서 가까워서 좋아.라고 했을 때 언니는 또 소리를 지르며 너 작은 스타트업에서 사람 스트레스 안 받고 일하고 싶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잖아. 그때는 말만 그렇지 못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패기 넘치게 나가더니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있잖아? 부럽다.라고 말했다. 벌써 2년이 넘은 옛날 일이었는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언니가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내 돌머리도 신기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과거에 내가 그렇게 원하고 꿈꿨던 대로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던가,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돕는다 같은 사이비의 헛소리와는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취향이라는 것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작은 선택을 만들고, 작은 선택이 모여 큰 선택을 만들고, 그렇게 내 삶을 천천히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놓는다. 나는 왜 이 회사에 들어오게 됐을까? 집에서 걸어 15분 거리인 전망 있는 마케팅 스타트업이라서. 내 집은 왜 여기가 됐을까? 조용하고 한적하며 분위기 있는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글은 왜 다시 쓰기 시작했던 걸까? 유럽여행을 다녀온 후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글이 매거진 콜라보로 당선된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여러 플랫폼에 글을 쓰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예전에 친구를 따라 사주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사주를 봐주시는 분은 나에게 적당히 벌어먹고 살지만 큰 부자는 못될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아쉬움도 있었지만. 예를 들어 28살에 로또가 되어 일확천금을 얻는 행운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돈을 많이 벌 사람들은 그 목표를 위해 인생의 다른 행복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 돈을 희생시키는 사람이다. 내가 돈을 많이 벌 팔자였다면 연봉을 천만 원 올려주겠다는 회사로 홀랑 이직을 해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회사는 우선 집에서 멀었고, 시끄럽고 번잡한 출근길을 감내해야 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연봉이 천만 원 낮더라도 퇴근 후 내 저녁을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삶이 더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향해 던지고, 성실하고 확고하게 대답하라.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였을 때 자신의 본질이 뚜렷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니체의 물음에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답을 할 수 있다. 나는 영화, 책, 음악을 사랑하고 의식주에 '충실'할때 행복하다. 충실하다는 것은 그것들을 누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어떤 로맨틱한 연애나 그 어떤 화려한 인생보다 이 소박한 것들이 내 마음을 채우고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을 위해 삶의 다른 것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다움' 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나다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맛있는 술과 함께 예술을 누리는 삶이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울리는 없다. 나는 나다움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친구로 곁에 둘 것이고 그렇게 나의 세계는 점점 풍요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