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찾지 말고 재미를 찾기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구조의 틀에서 톱니바퀴처럼 노동을 하다 보면 이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독하게 무료하고, 그래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답을 찾았고, 누군가는 소확행이라는 답을 찾았다. 위대한 철학가들도 냉소와 허무주의로 빠지곤 했다.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질문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빛을 잃어버리고 무기력과 허무로 빠져버리고 만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 사상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해 보려고 했지만, 끝내 '그래서 젠장, 니체는 초인이 됐나?' 하고 이죽거리게 되는 것이다. 재능이 있고 열정이 있다 해도 먹고사니즘의 덫에 걸려 허우적 대면서 '결국 자신의 재능과 의지로 뭔가를 이뤄내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삶에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나한테는 답이 없다.'라고 결론지어 버린다. 나의 이런 허무주의에 반박을 제기한 것은 어이없게도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였다.
나는 이 노동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그동안 너무나 많이 포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글, 그림, 음악과 같이 많은 재능과 많은 돈(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난 망했어'라고 하소연하고 다녔다. '나는 영원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만족하며 살지 못할 거야.' 그런데 웃긴 건 나는 아직 글을 쓰고 있고, 그림도 그리고 있다. 아쉽게도 음악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이 손을 뗐다. 되돌아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내가 도달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나의 기준치를 너무 높게 잡은 건 아닌가? 글을 쓴다 하면 프란츠 카프카 같은 작가는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림을 그린다 하면 호안 미로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이상적인 기준치에 도달하지 않는 부수물들은 죄다 쓸모없는 졸작이고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나를 재단해왔다.
예전에 그림을 그리는 어떤 친구가 있었다. 충분히 재능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상업적 그림 판매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매번 술을 마시며 자기를 평가절하하는 친구에게 너는 잘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내가 ㅇㅇㅇ가 될 수 있을 것 같아?(본인이 선망하는 예술가 이름)' 그 앞에서 나는 약간 바보 같은 표정을 하면서 대답했다. '아니.. ㅇㅇㅇ까지는 아니라도 결국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마 친구는 많이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 후로 우리는 소원해졌으니까. 그때 나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주는 자람들이 있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왜 그런 천재만큼 되지 않으면 쓰레기라고 하는 걸까? 친구의 이상향은 레전드가 되는 것이었다. 명성있는 예술가, 시대에 기록되는 레전드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짓을 나는 약간 다른 버전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모니터의 쨍한 백지를 노려보며 한 문장을 썼다가, 프란츠 카프카는 문장을 쓸 때 꼭 들어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면 3일이고 4일이고 글을 이어 쓰지 않았다는 말을 생각해 내고 다시 내 문장을 읽어보며 백스페이스를 가격했다.
그런데 김영하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아침, 잠을 자고 있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첫 문장인데 저런 감당할 수 없는 문장을 써놓은 다음에 이 문장을 감당하기 위해서 써 내려간 게 현대문학의 걸작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대단한 작품을 내놓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매일 글을 쓰고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행복해지고, 간혹 취미가 일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내가 정해놓은 목표치를 올려다보며 살면 목이 빠질 것 같이 아플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현실에 발을 붙이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풍경도 둘러보고 즐거움도 찾는 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쓰니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 하세요'와 비슷한 의미인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어차피 너희들은 자아실현 같은 거 못하니까 치킨 한 마리에 행복해하고 끝내라'라고 하는 이 사상을 나는 진짜 너무 개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치킨 한 조각, 술 한 모금에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인간은 결국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소확행으로 버무려서 잠재우려고 하면 안 된다. 욕망이 없으면 발전도 없기 때문이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만 충족된다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어떻게 보면 동물에 한해서이다. 아니, 동물도 애정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굉장히 길고, 지루한 마라톤이 될 것이라는 것도.
나의 친언니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다. 정확히 학자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노동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일을 다니는 동안 많이 괴로워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계속해서 억누르며 5년을 버티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러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싶다고 입이 닳듯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탈조센' 해서 독일로 간 청년들의 삶이 이곳에서보다 어떻게 더 나은지 인터뷰하기 위해서 독일로 가 다큐를 찍을 계획이라고 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답을, 탈출구를 찾고 싶다면 그 답을 찾는 것 자체를 목표로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으로는 어떤 사람이 답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 주변에 비슷한 답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렇게 하나의 프로젝트가 생긴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결과물에 영향을 받아 각자의 돌파구를 찾는 사람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 아닐까? 이상적인 자신에 대한 목표를 너무 높게 잡는 것은 머리를 하늘에 매다는 것이다. 머리를 하늘에 매달아 놓고 발을 땅에 딛지도 않으면서 왜 나는 하늘과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고 좌절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또 있을까.
포기하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나아갔으면 좋겠다. 니체나 쇼펜하우어도 결국 찾지 못한 답을 우리가 어떻게 찾겠는가, 그러나 그 과정이 저마다의 답이 될 수는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나는 응원한다.
대성당이라는 단편소설의 마지막 대사는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이다. 원문은 It's really something 이다.
something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small+thing 이라고 한다. 작은 일이라는 단어가 대단하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그런게 아닐까, 작은 일들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something 이 되는 것.